숫자가 전하는 직관의 힘
촬영 다음날, 모처럼의 재택근무는 달콤했습니다. '아이디어 창출'이라는 핑계와 더불어 노트북을 열어 두고 빈둥빈둥. 금세 하루가 다 지났습니다. 모니터 속도 포근한 방도 지루해질 무렵 시원한 맥주 생각이 나 편의점을 향하던 길이었습니다. 모처럼 하늘에 떴다는 슈퍼문도 밝고 멋졌지만, 아무렇지 않게 제 눈을 잡아 끈 건 집 앞에 잠시 세워진 체육관 셔틀이었습니다.
밴의 그림과 이름을 보아하니 줄넘기 같은 점프와 관련된 체육활동을 진행하는 체육관인가 봅니다. 폴짝폴짝 뛰어놀며 몸도 마음도 즐거워지는, 그런 곳이겠지요.
하지만 제가 넘겨짚은 그대로 "폴짝폴짝 뛰어놀며 몸도 마음도 즐겁게"라고 쓰여 있었으면 뇌리에 팍 꽂히는 임팩트가 부족했을 겁니다. 그저 쓰인 문구를 읽으며 이 체육관이 어떤 체육활동을 하는 장소인지를 알게 되고, 그걸로 끝이었겠죠. 체육관이 아이들에게 전하는 즐거움의 크기를 깨닫기는 역부족이니까요.
대신 체육관 밴에는 이렇게 쓰여 있더랍니다.
즐거움에 크기란 게 있을까요? 있다면 그것은 어떤 형태로, 어떻게 커다랄까요. '코끼리만큼 커다란 즐거움'일까요, '놀이동산만큼 커다란 즐거움'일까요. 아니면 '1억원만큼 커다란 즐거움'? 전부 마뜩잖습니다. 즐거움과 같이 추상적인 대상을 또 한 번 비유를 통해 구체화하는 것은 좋은 선택지가 아닌 것 같습니다. 대신 그 즐거움의 크기를 수치화해서 표현한다면 어떨까요? 그것도 우리 모두에게 똑같이 익숙한 '시간'으로 수치화한다면요.
그래서 나온 말일지는 몰라도, '24시간 중 가장 즐거운 1시간'이라는 카피는 확실합니다. 체육관에서 얻을 수 있는 즐거움의 크기도, 그 크기를 전하는 방식도 확실합니다. 너무 확실해서 제가 굳이 더 설명하려는 일이 어리석게 느껴질 정도군요. 단지 '하루 중 제일 즐거운 시간'이라는 말과 '24시간 중 가장 즐거운 1시간'의 차이를 느끼시길 노파심에 덧붙일 뿐입니다.
좋은 카피는 곱씹어 볼 필요가 없는 카피라는 생각을 종종 합니다. 멋들어진 은유법, 직유법도 문학을 벗어나 카피의 링 위에 놓이면 오로지 전달력 하나만을 가지고 평가되기 마련이죠. 카피라이터는 멋진 말을 하고 싶은(!) 욕심을 저버리고 확실하고 쉬운 말을 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사람일지 모릅니다. 그러면서도 임팩트를 남겨야 한다는 게 카피라이터라는 직업에 전문성을 부여하는 요소일 테고요.
이런 측면에서 '24시간 중 가장 즐거운 1시간'이란 카피는, 앞서 말한 카피라이터의 역할에 부합하는 문구처럼 보입니다.
사실 숫자를 사용할 수 있는 카피란 카피라이터에게는 행복한 카피입니다. 광고주에게 확실한 정보와 근거가 있어서 그것 자체를 커뮤니케이션의 무기로 쓸 수 있는 상황이라면 미사여구가 어디에 필요할까요. 가장 강력한 무기는 늘 팩트 그 자체이니까요. '업계 1위'라던가 '100% 함유'처럼 숫자로 압도할 수 있는 상황에는 오직 수치를 남길 수 있는 바탕만을 고민하면 됩니다. 하지만 그와 같은 팩트가 없는 상황에서 무형의 가치를 피부에 와닿게 하기란 어렵습니다. 그럴 때 숫자라는 만인 공통의 단위를 이와 같이 활용한다면, 우리에게 큰 힘이 되어줄 것입니다. 우리가 카피라이터가 아니라 해도 말이죠.
확실한 정보를 담아, 일곱 살짜리 아이가 봐도 이해할 수 있게, 그러면서도 기억에 남게.
아, 밤을 새도 어려운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