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도호쿠여행기
이야기를 위한 여행
아주 오랫만에 나와 동행(남편), 둘이 떠나는 배낭여행이었다. 처음 써 보는 손바닥 소설의 무대 니가타와 국보 5층 목탑이 있는 하구로 산, 게이샤의 공연을 볼 수 있는 사카타, 그리고 시인 바쇼의 흔적이 남아 있는 야마가타가 이번 여행의 주된 목적지였다. 일본의 동북지방, 즉 도호쿠 소도시 여행 9박 10일이었다.
처음 이 지역 코스를 결정했을 때 나와 동행은 일본 전통문화 체험, 온천에서의 휴식, 소도시 걷기를 키워드로 잡았지만 나는 한 가지가 더 있었다. 집안일과 직장일에서 완전히 해방되어 나만의 시간을 가지게 되었으니 이 귀중한 시간에 내가 쓰고 싶은 이야기를 구체화시켜보고 싶었다. 수십 년간 마음에 품고만 있던 글쓰기라는 작업에 조금 더 잰걸음을 디뎌 보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간이 있어야 하고 자극이 있어야 했다. 그래서 이번 여행은 큰 코스만 정하고 세부적인 것은 하나도 알아보지 않았다. 현지에서 만나는 '뜻밖의 경험'에 기대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그 기대는 실현되었다. 예상치 못한 경험, 그것은 두 곳의 항구도시에서 융성했던 경제활동의 역사와 그에 딸린 유흥문화, 유곽과 기녀들의 흔적이었다.
소녀는 아시아의 최북단, 툰드라의 눈덮인 마을에서 태어났다. 가난하고 험한 삶의 조건 속에서, 그리고 무지 속에서 소녀의 일생 한 자락이 결정되었다. 마을에서 꼬박 이틀을 더 가야하는 좀 더 부유한 부족에게 시집을 가기로 결정되었기 때문이었다. 보따리 하나에 바다 코끼리 고기말린 것만 싸들고 시집을 가니, 남편은 열댓살 더 많은 난폭한 남자였다. 14세의 신부에게 결혼은 무자비한 폭력뿐이었다. 병든 시부모를 봉양하고 남편의 학대를 참아내던 소녀에게 마을 소년이 호감을 가지고 접근한다. 소년은 남편에게 죽임을 당하고, 소녀는 고향마을에선 누구나 알고 있던 독버섯에 대한 지식을 활용, 남편을 살해하고 도망친다. 도망치다가 붙잡혀 먼 지역에서 온 노예상인에게 넘겨지고, 난생 처음 큰 배를 타고 타국의 유곽으로 팔려간다.
니가타의 대부호였던 상인, 사토씨의 별저 2층은 환한 햇살이 쏟아지는 정원의 푸른 광휘를 한껏 흡수했다. 그리 많지 않은 관광객들이 조용히 소근대는 소리, 새소리가 들리는 아름다운 그 별장에서 나는 멍하니 혼자 앉아 이곳으로 팔려온 한 소녀의 이야기를 구상해 보았다. 축치족과 야쿠트 족의 설화를 읽으며 생각했던 이야기의 조각들을 맞춰 본다. 여기, 니가타가 중국과 아시아 동북지역 무역의 거점이었다는 점이 조각을 이어주는 접착제였다. 오전의 니가타 박물관에서 본 멋진 '북전선'도 상상력을 더해 준다. 이곳 장인과 상인들이 힘을 합쳐 만들었다는 날렵한 배, 북전선에 노예소녀가 실려오는 것이다.
니가타의 평야지대에서 생산된 쌀과 교토의 정교한 인형 등 여러 품목들을 중국의 비단, 차, 도자기와 바꾸었던 북전선. 니가타는 2차대전 당시 만주로 가는 군인을 실어나르는 주요 항구이기도 했다.
그리고 항구 도시중에서도 유달리 기예를 갖춘 게이샤, 이곳 말로는 게이기가 발달된 곳이 여기 니가타이가도 하다. 어젯밤, 한동안 거닐었던 니가타의 후루마치 (옛거리)에서 마주했던 에도시대의 거대한 유곽 건물 유적도 상상력에 좋은 자극이 되었다. 그렇지만 여자주인공을 게이기로 만들 생각은 없다. 그보다는 치유자가 좋지 않을까. 독과 의학을 잘 다루는 여자, 유곽의 여자들을 돌보며 여성들의 병과 출산과 임신을 다루는 치유자. 그런데 어디선가 본 듯 하다. 요즘 푹 빠져 보았던 넷플릭스 에니메이션 '약사의 혼잣말'과 조금 비슷하지 않은가. 아니면 '대장금'에게서 알게 모르게 영향을 받은 것일까.
한국에서 오신 분이세요?
유창한 한국말이 들려와 내 상상은 거기서 그쳤다. 눈을 반짝이며 다가온 사토씨 별저의 안내인 여성은 30대 중반 정도 되었을까. 한국 드라마에 빠져 한국어를 배우다 보니 잘 하게 되었다고 한다. 한국 드라마의 '감성을 폭발시키는' 점이 너무나 좋다고 한다. 감성의 폭발. 그런 이야기를 읽은 것은 언제였나. 밤잠을 못 이루며 다음 이야기를 궁금해하고 설레는 가슴을 진정하기 어려웠던 그런 재미가 까마득하다.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그이와 한참 수다를 떨었다. 정원에서 불어오는 바람에는 실린 등나무꽃의 진한 향기가 머리를 어지럽혔다.
대상인 사토씨의 여름 별저. 여기서 예능과 다도를 즐겼다고 한다. 후에 니가타를 대표하는 재벌로 성장한다.
-그럼 남자 주인공은 어쩔 거야. 일본인으로 해?
-아니, 여기로 무역하러 온 한반도 사람으로. 근데 들어 봐. 남자 주인공 말야. 6,7세기쯤을 배경으로 해서 고구려 후예로 하는게 좋을까. 아니면 17세기로 하는게 좋을까. 6,7세기쯤으로 하면 당나라 때니까 고구려 멸망 후랑 잘 맞아. 남자를 고구려 왕실 후예로 하고 장사꾼이 되어서 왔다가 여자 주인공을 여기서 만나는 거지.
-그거 너무 순정만화 스타일이잖아. 그 넷플릭스 애니를 너무 열심히 본거 아냐?
-무시하지 마. 순정만화 같다고 해도 그 애니 말야. 원작 웹 소설이 300만부 팔렸데.
-사..삼백?
나의 동행은 눈을 크게 뜬다. 그거 좋다. 웹소설로 돈 버는 거야. 노후대비도 그렇게 해 보면 되겠네. 열심히 써 봐. 수익구조는 어떻게 돼? 경제학과 출신이라 뭐든 계산적으로 접근하는 그이지만 미안하게도 웹소설로 돈을 벌 재주는 도저히 나오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낯간지럽고 얼굴이 붉어지며 열손가락이 다 오그라드는 로맨스 웹소설 중에서도 생각보다 재미있는 것들이 꽤 많았다. 재미, 그것이 문제였다. 그리고 로맨스. 로맨스라.
-바보야, 문제는 재미야. 그냥 로맨스 소설 쓰는 게 어때? 조국을 잃어버린 고구려 왕자, 그거 좋네.
-꼭 왕족이 나와야 돼나 고민이야.
-왕족이 나와야 재미가 있지. 근데 그냥 왕족은 아니고 뭐 좀더 사연있는 왕족이라야지.
-그래도 너무 뻔한 것 같은데. 왕족 남자에 비천하지만 똑똑한 여자.
걷고 걸어서 '오자와'라는 또 다른 부호의 집에 당도했다. 낡은 집들이 모여 있는 골목 한구석에서 거짓말처럼 나타난 집이었다. 오자와의 집은 온통 검은 색으로 칠해진 목조건물이라 카리스마가 넘쳤다. 오, 이거 괜찮은데. 노예상인의 집으로 하면 좋겠다. 이름은 '검은 성'.어둠의 세계를 지배하는 상인집단의 거주지로 어떨까. 동북일대를 휘저으며 반도와 대륙까지 넘나드는, 상인이며 해적인 비밀스런 집단. 예전에 이른바 '왜구'에 대한 자료를 본 것이 떠올랐다. 고려말, 왜구의 전성시대에 그들은 중국의 해안은 물론 내륙까지 침탈했고 고려의 개경까지 유린했다. 그중 이성계가 쏘아죽인 왜구 '아기발도'가 유명하다. 젊고 큰 체격에 싸움에 능해 고려군을 떨게 했다는 전설의 왜구. 왜구 말고 해적이라는 명칭으로 잘 꾸며서 남자 주인공으로 만든다면 어떨까 싶었다.
그러니까, 그 해적이랑 여주인공이랑 로맨스가 있는거지?
동행은 끝까지 로맨스를 포기하지 않았다. 고구려 왕자따위는 집어치우고 어쩌다 섬으로 건너간 반도인이 해적질을 하는 대장이 되어...그래서? 연애만 하고 끝날 수는 없으니 뭔가 위대한 사명을 완수해야 하나. 그러면 남자가 주된 주인공이 되는데... 글쎄, 그것보다는 여성을 메인으로 내세우고 싶다.
숙소에 들어와서 호텔 메모장에 이것저것 끄적여 본다. 마트에서 사 온 라면과 샌드위치, 숙성회와 사케가 방안을 어지럽히고 동북의 밤은 깊어간다.
이야기만 있으면 왠만한 슬픔은 이겨낼 수 있다.
교토에서 배를 타고 항구를 떠돌다 정착한 기녀들은 니가타 위쪽, 작은 항구도시 사카타까지 올라갔다. 그곳의 가장 유명한 관광지이며 여전히 살아있는 요정인 '소마로'가 작지만 한때 번성했던 항구도시의 요정 문화를 보여준다. 마이코(견습 게이기)의 공연을 기대하고 갔는데 예매를 하지 않았기에 발걸음이 바빠졌다. 아침 일찍 일어나 기차를 타고, 역에서 소마로까지 부지런히 걸었다. 정말 작은 시골 어항이었다. 늘 그렇듯 지도만으로는 길을 못찾아 여기저기 헤메다가 드디어 소마로 발견, 급한 마음에 미닫이 문을 힘주어 열어젖혔다. 아, 그 순간, 충격파가 머리를 강타한다. 하구로산에서 5층목탑을 보았을 때는 성스럽고 고매한 충격파를 맞았다면, 오늘의 충격파는 뭐라 말할 수가 없었다. 완전히 새로운 세계에 진입한 느낌이랄까. 바로 눈 앞에 하얀 백분으로 화장한 게이기가 서서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금박이 박힌 화려한 붉은 기모노를 입고서.
'진짜다.'
이런 말이 목구멍까지 나오는 것을 꿀꺽 삼켰다. 매표를 하는 또 다른 게이기는 전혀 화장을 하지 않았고 회색이 은은히 감도는 하얀 기모노를 입은 수수한 모습이었지만 그 또한 매우 아름다웠다. 나긋하고 부드러운 느낌의 아름다운 여인들. 공연에 앞서 끝없이 이어질 것만 같던 소마로의 붉고 긴 복도와 비밀스런 방들, 작은 정원들을 둘러보았다. 이 요정안 어딘가에 사연 많은 공간을 설정해 두고 싶다. 기녀들 중 가장 기가 세고 지적인 한 여인을 상상한다. 시를 짓고 춤과 노래에도 능하지만 곧 은퇴를 앞둔 여자. 그녀는 은퇴한 기녀들을 모아 여인들만이 사는 세상을 만들려 한다. 기녀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먹고 살 거리를 마련해주려 한다. 여주인공과는 모녀같은 관계를 형성하지만 상류계층의 음모에 휘말려 반역자가 된다. 반역자가 된 그들이 한동안 여도적이 되어 그들을 갈취했던 이들에게 보복도 하고 땅을 마련해 어디에선가 같이 살고자 하나......
소마로의 17번 방에는 유명화가 타케히사 유메지의 전시관이 있다. 다이쇼 시대의 대표화가인 그는 게이
샤등 여인들을 많이 그렸다.
사방이 막힌 소마로의 내부 정원.
샤미센이 띠용띠용 소리를 내지르고 파랗고 빨간 기모노를 입을 두 마이코가 다다미 위에 서자, 내 상상도 일단 날개를 접었다. 세 가지 전통춤이 15분간 펼쳐진다. 생음악으로 샤미센 연주를 듣기는 처음이었고 일본 전통 노래를 듣기도 처음이었다. 두 명의 마이코 중 한 명이 단연 춤이 뛰어났고 미모도 돋보였다. 니가타의 부호들, 상인들이 그녀를 점찍어 연회에 불렀을 법하다. 다시, 툰드라에서 온 나의 주인공은 꽈리열매와 봉선화, 괭이밥꽃을 섞어 기녀들을 위한 약을 만든다. 피임약도 낙태약도 만들 수 있다. 때로는 매독에 걸려 죽어가는 기녀들을 위한 약까지도.
-그럼 로맨스는 어쩌지?
-글세.
-아예 남자들을 배제하는 이야기가 쓰고 싶어?
-아니. 나도 로맨스 좋은데.
돌아오는 길, 소도시엔 사람이 없었다. 역까지 가는 버스는 30분 후에나 온다기에 그냥 걸어가기로 했다. 멀리, 만년설을 이고 있는 초카이산이 보였다. 좋다. 이것도 배경으로 넣자. 설산과 유곽이 있는 항구 도시. 배경은 6-7세기경으로 할지 아니면 아예 17세기쯤으로 할지 계속 고민이다. 17세기쯤으로 잡아 총을 등장시키고 싶기 때문이다. 여성들이 총으로 자신을 보호하는 이야기를 넣고 싶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공연시간이 되자 관광객들이 만석을 이루었다. 포토타임이 길게 이어졌다.
다시 숙소 근처, 어제 갔던 동네 마트를 찾았다. 이 소도시는 편의점도 거의 없다. 문을 닫기 직전, 마트에서 먹거리와 맥주를 샀다. 이런 시골 마트에도 한국김치와 비빔밥을 팔고 있었다. 통통한 몸매에 두꺼운 안경을 쓴 아주머니가 계산대를 지키고 있었고 우리가 한국사람임을 알고는 '감사합니다'라고 수줍게 말을 건냈다. BTS를 좋아한단다. 숙소까지 어두운 길을 걸었다. 작은 신사가 을씨년스러웠다.나는 문득 새로운 손바닥 소설 하나를 떠올렸다.
-이건 어때? 저기, 마트 아주머니가 한류팬이고 드라마랑 K팝에 푹빠져 사는 거야. 그걸 옆집의 할아버지가 아주 못마땅하게 생각해. 근데 한국에서 온 여행자가 있어. 마트에 들러서 물건을 사면서 아주머니랑 이야기를 나눠. 그걸 우연히 본 옆집 그 할아버지가 여행자한테 약을 먹여서 납치해. 그리고 저 신사 지하에 감금하는 거야. 한국 여행자가 없어졌다고 난리가 나. 마트 아줌마가 뉴스를 보고 실종을 알게 되서 신고하려고 하는데, 우연히 할아버지가 여행자의 물건을 가지고 있는 걸 봤어. 그래서 여행자를 구해주지.
-할아버지가 왜 납치하는데?
-극우라서. 한류가 너무 싫고 한국인도 싫은거야. 혐한 할배인거지.
-어디서 본 것 같은 이야긴데...
-그래? 아참, 지난 번에 실종된 한국여행자, 그 사람은 찾았나?
-아마 못 찾았을거야.... 그런데 그런 이야기는 일본 사람들이 싫어하겠다. 괜히 국가간 갈등이 될 것 같은데.
-국가간 갈등이 될 정도로 많이 보겠냐? 걱정을 하덜 마셔.
우리는 어둠속을 터벅터벅 걸었다. 5월이지만 동북의 밤바람은 아직 찼다. 먼 바다와 깊은 산에서 동시에 불어오는 맑고 차가운 바람 속에서, 나는 새삼 인간이란 종의 위대함을 떠올렸다. 우리 인간만이 놀라운 상상력으로 완전히 새로운 세계를 창조할 수 있다. 먼 중세로도, 우주로도 날아가는 이 마음, 이 마음안에서 우리는 여러 생을 살고 여러 사람으로 태어날 수 있다. 죽는 날까지, 아마도 마음의 상상력은 멈추지 않을 것같다. 호모나랜스, 인간은 이야기하는 본능을 지녔기 때문이다.
야마가타 현의 시골길엔 파란 달빛이 쏟아지고, 우리 두 사람의 긴 그림자가 좁은 골목길을 덮는다. 이름없는 이자카야의 빨간 등이 멀리서 아른거렸다. 문득 우리 동네 빵집에 써 있던 말이 생각났다. "빵만 있으면 웬만한 슬픔은 이겨낼 수 있다." 그 재치있는 말을 이렇게 고쳐 보았다.
"이야기만 있으면 웬만한 슬픔은 이겨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