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을 쓰고 싶었으나 능력의 부재로 결국 나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는 에세이를 쓰게 되었다.
에세이, 앞서 말했듯 나의 이야기를 쓰는 것이다. 나의 생각, 느낌, 감정, 시선, 가치관 등 나를 중심으로한 타인과 세계에 대한 상호작용이 어찌 이루어지는가에 대한 내용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둔감한'이라는 형용사를 붙였을까? 둔감하다는 것은 감정이나 감각들이 무디다는 뜻이다. 하지만 '에세이는 자신의 이야기를 쓰는 것이니 자신이나 주변 환경에 예민해야 하지 않은가?'라는 의문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꼭 그럴 필요는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민하고 둔감한건 어떠한 상황에 대한 반응성에 대한 말일뿐이다. 나를 둘러보고 에세이를 쓰는 것은 순간적이 반응성이 아닌 천천히 회기하고 분석하고 해석하여 글이라는 형태로 가공하는 것이다. 예민함과 둔감함이 에세이를 쓰는 것 자체와 관계없다면 왜 굳이 '둔감한 에세이'라 쓴 것이냐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바로 '내가 둔감해서'이다. 나란 사람은 기질적으로 둔감하다. 그런데 내가 봐온 에세이들은 민감한, 예민한 사람들의 글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렇기에 공감이 잘 가지 않았으며, 그저 이러한 방식의 시선이, 가치관이 있구나 라는 감상만이 남을 뿐이었다. 그렇기에 에세이를 읽던 초반에는 새로운 것들이 신선했으나 다양한 에세이들을 어느 정도 읽고 나서는 그저 '다른 사람의 일' 정도로 일축되었다. 심지어 대부분 예민하다는 부분은 거의 비슷하였기에 그 결이 더욱 [고통 없는 사회]라는 책에 나온 '같은 것들의 변주'라는 표현이란 말과 같이 느껴졌다.
둔감한 사람들의 에세이는 어째서 찾아보기가 힘들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내가 생각해본 이유 중 한 가지는 둔감하기에 스스로 느끼고, 생각한 것을 글로 써야겠다는 동기가 되지 못해서이다. 동기는 강력한 정동에서 발해지는 정서와 감정, 느낌들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그런데 둔감하면 이것들의 역치가 높다. 발현돼도 크게 다가오지 않는다. 비유하자면 매운 음식과도 같다. 누군가는 너무 매워서 땀도 흘리고, 얼굴도 빨개지고, 물도 찾을 것이다. 그리고 너무 맵다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는 이것이 매운가 하며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며 그냥 먹을 것이다. 둔감한 사람은 후자와 같다. 타인과, 세상과 하는 상호작용에서 글을 쓸 만큼의 커다란 동기를 얻기 힘든 것이다.
그럼 나는 에세이를 왜 쓰고 있는가? 사실 동기 자체가 크진 않았다. 그래서 글을 써봐야지라는 생각은 많이 했어도 제대로 글을 쓰진 않고 지지부진 미룰 뿐이었다. 지금 글을 쓰는 동력원은 타인 그리고 세상과의 상호관계에서 온 자극이 아닌 나 자신에 대한 탐구욕에 가깝다. 나라는 사람은 어떤 존재인가 하는 것에 대한 고찰이 동력원이다. 사실 이런 탐구욕도 목적이 나 자신에 대한 탐구인 만큼 굳이 글로 쓸 필요는 없다. 특히 에세이라는 특정 형태로는 더욱더 말이다. 그저 쪽지처럼 메모해도 될 것이지만, 앞서 말했던 써봐야지란 생각과 겹치는 것이기에 에세이로 쓰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소설의 형태로 욕심을 내보았지만, 나에게는 상상의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재주는 없었다. 결론적으로 에세이라는 형태로 내가 어떻게 타인과 그리고 세상과 상호작용하는지를 탐구해보았던 것을 표현해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