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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루트 Nov 24. 2021

가치판단

앞서 목적을 설정하기 위해 가치의 판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가치란 사람마다 전부 다를 것이다. 그렇다면 나름 외부에 둔감하다고 생각하는 나는 과연 어떤 가치를 중요시 여기며, 핵심가치로 삼고 있을까?

사실 둔감함이 크게 가치 설정 자체에 영향을 주지는 않았다. 그 영향은 가치에 따른 실제 상호작용의 방식에 나타났을 뿐이다. 즉, 나와 비슷한 가치체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더라도 그 실현 방식은 다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럼 다시 본래 이야기하려던 가치 탐색으로 돌아와 보자. 나는 어떻게 가치를 '설정'했을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설정했다는 것이다. 외부에, 세상에, 사회에 어떤 절대적 가치가 있어 그것에 따르는 것이 아니다. 나 스스로 충분히 탐구하여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찾아가는 것이다. 내 인생을 되돌아보며 행복한, 괴로움, 즐거움, 슬픔 등등 기억에 가장 깊게 남았던 감정들의 경험을 떠올려 보는 것이다. 타인이 좋다고 하는 것, 사회가 결정해 놓은 것이 아닌 자신의 삶 속에서 되돌아보는 것이다.


나는 언제 가장 행복했고, 가장 괴로웠는가? 극단적인 두 경험을 되돌아보았다. 왜냐하면 내가 추구하는 것의 결과는 행복일 것이고, 추구하는 것의 부재나 회피해야 할 것의 결과는 괴로움일 것이기 때문이다.


먼저 행복이라는 부산물은 언제 나왔는가? 행복은 감정일 뿐 목적이 아니다. 행복할 때 행복한 것이 아닌, 어떠한 것이 행복이라는 결과를 내보였을 뿐이다. 행복을 추적하여 공통적으로 나오는 가치를 찾아가야 한다. 선명하고 깊게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일수록 추구하고자 하는 것에 가까울 것이다.

나의 경우에는 로댕의 '지옥의 '을 봤을 때, 순천만에서 석양이 지는 것을 본 순간, 퇴근길의 석양을 본 순간, 밤하늘의 별들을 본 순간들이 나의 기억에 강하게 남아있었다. 이러한 기억들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먼저 직접적인 행동은 아니었다. 전부 무언가 보았을 때이다. 보는 순간 무엇을 느낀 것인가? 어떤 걸 느꼈으며, 어떤 생각이었는가? 하나씩 되새겨본다.


먼저 가장 어릴 때의 기억인 로댕의 '지옥의 문'을 보았을 때부터 생각해 보았다. 당시에 처음에는 '생각하는 사람'을 기대했지만 기대는 곧 실망으로 변했었다. 별로 와닿는 게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옥의 문'을 본 순간 그 자리에서 세상이 멈추는 듯했다. 그 웅장함에 압도되었을 수도 있다. 그 생생함에 감탄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가장 크게 와닿은 것은 수많은 인간 군상과 그 위의 생각하는 사람의 모습이었다. 단독으로 존재하던 생각하는 사람에서 볼 수 없던 무언가를 보았다. 혼자일 뿐인 생각은 나에게 와닿지 못했지만, 수많은 인간군상과 그 위에서의 생각은 나에게 크게 와닿았던 것 같다. 어째서 그것에 그리 크게 감화되었을까?


먼저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 와닿은 것 같다. 존재함으로써 그 누구도 침해하기 힘든 가장 나다운 것 중 하나는 바로 생각한다는 것일 것이다. 외부의 영향을 받아도, 외부의 것을 생각해도 결국에는 나, 고유의 것이다. 가장 나다운 것이자, 스스로 해야지만 할 수 있는 능동적인 것. 그것이 생각하는 것이다.

그럼 나는 생각하는 것에 감화되었는가? 아니면 나다움? 그것도 아니면 능동성? 이것만으로는 내가 어느 부분에 감화되었는지 확신하기 힘들다. 그렇기에 다른 부분도 마저 되돌아보았다.


단독으로 있던 '생각하는 사람'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것을 느끼게 해 준 '지옥의 문'의 다른 부분인 수많은 인간군상들, 그들이 있음으로써 나에게 와닿았다는 점을 조명해보았다. 독립된 '생각하는 사람'무엇이 다르게 혹은 추가로 느껴졌는가?

우선 다르게 느껴진 것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지에 대한 추론이다. 단독으로 있는 동상에선 그저 그 혼자만의 무언가를 생각하겠거니 하며 무료하게 다가왔다면, '지옥의 문'에서는 그 수많은 군상 중 하나이면서도 마치 한걸음 물러나 그들을 관조하는 듯했다. '지옥의 문'에 나타난 자신을 포함한 군상들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는 듯하였다. 그것은 완전히 독립되어 따로 놀지도 않았고, 동시에 그 안에 파묻혀 자신을 잃지도 않은 그런 모습이었다. 나는 그것에 빠졌던 것 같다.


'지옥의 '의 그 기술적 완성도나 웅장함 보다는(물론 기술적으로도 완성도 높은 아름다운 작품이다.) 전체 속에 자신을 유지하고 있는 '지옥의 문 위에 있는 생각하는 사람'에게 매료된 것 같았다. 하지만 자신을 유지함에도 전체 밖으로 나간 것이 아니다. 그 조차도 그 속에 포함되면서도 군상으로 남지 않고 객체로서의 자기를 유지하고 있다. 그렇기에 난 그 기억을 통해 관계와 자유로운 것 모두를 꽤나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전체의 분위기에서 한 발자국 떨어져 전체에 휩쓸리지 않고 스스로 생각을 하고 있는 모습에서 나는 능동성에도 가치를 두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여기서 관계와 자유는 비슷한 수준의 가치라고 생각된다. 관계없는 자유도 자유 없는 관계도 나에겐 핵심 가치가 아니다. 그 둘 모두가 중요하다. 하지만 그 비율은 자유가 좀 더 높은 듯하다.  다음으로 강하게 다가온 것이 능동성이기 때문이다. 나는 자유가 표현되는 형태를 능동성이라 생각한다. '능동적이다'라는 것은 자유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즉, 나는 관계를 포함한 자유를 중요한 가치로 생각하며, 해당 가치에 대한 하위 가치로 능동성을 중요시한다고 생각된다. 단, 여기까지 생각함에 있어 단순히 지옥의 문을 본 경험만이 떠오른 것이 아니다. 이것이 가자 오래된 강한 기억이기에 이를 중심으로 설명했을 뿐 내가 행복을 느꼈던 다양한 경험들을 종합한 것이다.


하지만 자유, 관계, 능동성이라는 가치만으로는 방향성을 설정하기에 부족하다. 해당 가치에 반하는 방향은 소거할 수 있으나 이것만으로 목적을 형성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외의 다른 가치들을 좀 더 탐색해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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