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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을 맞바꾸다

수 십 년 전, 시골 어느 산부인과에서 일어난 일

by 오태웅

생명을 맞바꾸다.


7월의 여름, 시골 어느 작은 병원에서는 한 생명이 태어남으로 다른 한 사람이 세상을 떠나는 일이 일어났다. 어머니가 나를 출산하는 과정에서 극심한 하혈로 숨을 거두는 일이 생긴 것이다.

병원에서는 나름대로의 노력을 다했으나 수십 년 전 시골 개인병원이 가진 의료 기술로는 한계가 있었다.

결국 어머니는 숨을 거두었고 나는 세상에 나와 눈을 떴다.


가슴 아프게도, 세상에서는 간혹 한 생명이 태어나는 과정에서 산모와 아이 중 한 사람이 반드시 희생을 해야만 하는 일들이 생긴다. 그럴 때 일반적인 윤리 원칙은, 산모의 생명을 우선하는 것이다.

그런데 당시 어떤 이유였는지는 정확히 몰라도, 나의 경우에는 산모가 희생함으로

아기의 생명이 보존되었다.


열 달 동안 수고한 산모와 아기의 출생을 축하하기 위해 숨을 죽이고 기다리던 모든 이들의 마음은 어땠을까? 충격과 슬픔에 휩싸였을 것이 분명하다. 특히 어머니를 사랑했던 모든 이들이 겪었을 상실감과 고통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당시 어머니의 나이는 2-30대 초반으로 젊은 여성이었다. 한 남자의 아내였고 어느 부모의 소중한 딸이었다. 또한 누군가의 좋은 친구였으며 지역 교회의 소중한 자매였다. 따라서 굳이 말하자면,

나보다 어머니가 사는 편이 모두에게 이로웠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어머니는 자신의 생명을 버리고

나의 생명을 살렸다.


그렇게 나는 태어났다. 그리고 어느새 많은 세월이 흘러 당시 어머니의 나이를 훌쩍 지나 한 여자의 남편,

한 아이의 아빠이자 둘째 아이의 입양을 앞둔 입양부모가 되었다.

나는 지금 서쪽 바닷가에 위치한 영종도라는 섬에 살고 있다.

오늘도 나는 반짝이는 아침 햇살에 눈을 뜨고, 아내와 함께 바닷가를 산책하며 커피를 마시며,

아이의 사랑스러움에 매일 웃음꽃을 피운다.

나에게 있어서 이 모든 것은 당연하지 않다. 수십 년 전 나를 위하여 목숨을 버린 한 사람으로 인하여 누리게 된 소중한 삶이기에, 매일이 특별하고도 소중하다.





이 이야기는 내 삶에 일어난 실제 사건이지만, 동시에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믿는다.

우리가 지독히도 고달픈 세상을 살면서도 마음 한편에 어떤 희망을 품을 수 있는 것,

아픈 마음에 좌절하면서도 한켠에서는 '그래도 아직 소망은 있어!'라는 내면의 외침을 마주하는 것,

금요일 저녁, 퇴근 후에 좋아하는 사람들과 저녁 식사를 한 뒤 자유를 만끽하는 기쁨,

이 모든 것이 그저 주어진 것이 아니라고, 우리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신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모든 인간은 첫 조상인 아담과 하와의 타락, 그리고 불순종으로 인하여 악과 고난에 짓눌리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삶의 어떠한 의미도, 희망도 가질 수 없는 상태로 전락했다.

성경은 이와 같은 우리의 인생을 ‘죽은 자와 같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그냥 두지 않으시고, 살리시기로 계획하셨다.

때가 이르자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이 땅으로 오셨고, 마땅히 우리가 받아야 할 죽음의

저주를 십자가 위에서 대신 감당하셨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심으로 우리는 죽음에서 해방되어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된 것이다.


예수님이 행하신 이 위대한 일은, 세상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을 위해 창조주이신 예수님이, 그분의 존귀한 생명을 내어주시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는가? 우주의 크기에 비하면 바닷가의 모래알보다 훨씬 작은 존재인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사건을 무엇으로 이해할 수 있는가?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그 위대한 일을 행하셨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3:16-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를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존재로 여기며 낙심하고 좌절한다.

특히, 우리는 타인과의 비교를 통해 자신의 가치를 판단하는 경향이 그 어느 때보다 강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SNS와 유튜브 같은 온라인 플랫폼이 일상화되면서 타인의 이상적인 모습이 더욱 강조되고, 그로 인해 상대적 박탈감과 자존감 저하가 심화되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

예를 들어 외모나 집안, 가진 재정 혹은 사회적 능력 등이 타인에 비해 부족하다고 느껴지면 스스로에 대한 가치를 낮게 여겨 우울감 등에 빠지고 만다. 그러나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것이 있다.

‘나’라는 존재는 세상이 어떤 기준으로 가치 평가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점이다.

예수님께서 생명을 내어주시며 자신의 피로 사신 ‘나’는 오직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으로만 설명될 수 있다. 그분은 자신의 생명을 아낌없이 내어주실 만큼 나와 당신을 소중히 여기신다.

그러므로 어떠한 경우라도 당신의 존재적 소중함을 의심하지 말고, 허락된 하루를 자유와 기쁨으로 살아가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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