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느님 사랑해요
그렇게 난 세쌍둥이를 품기로 했다.
내 인생의 첫 임신, 모든 게 다 행복할 줄 알았는데 정말 스펙타클했다. 많은 일을 겪는 중에 심한 입덧으로 제대로 먹지 못하는 날들이 많았는데 이와중에 또 일을 해야했다. 출산 직전까지 일하는 산모들이 존경스러웠고 나도 그들처럼 열심히 일할 것이라 다짐했었는데 아이 셋을 지키기 위해서는 정리를 해야했다. 당시 나는 재활요양병원 2곳에 프리랜서 언어치료사로 일을 하고 있었고 퇴근을 한 후에는 장애아동 가정으로 홈티를 하러가거나, 대학원생 신분으로 학교에 가야했다. 그리고 재활병원에서 장애아동부모들을 대상으로 미술심리치료 봉사를 하고 있었다. 이 모든 걸 정리하려니, 책임감들이 날 짖눌렀다. 한군데만 그만 두는 것이 아니라 다수의 일터에서 수많은 관계로 엮인 소중한 사람들을 책임지지 못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힘들었다. 게다가 직업 특성 상 대체자를 구하기 어렵기에 클라이언트들에게 너무 미안한 마음이였다. 책임감을 빼면 온전히 몰두하기 어려운 직업이기에 어쩔 수 없는 현실이 괴로웠다. 하지만 난 내 아이들을 지켜야했다. 그렇게 최대한 빠르게 일을 그만두고 집에만 붙어있는 생활이 시작되었다. 대학생 때 학업과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조기취업을 하여 쉬어본 적이 한번도 없는 내가 드디어 집콕 생활을 하게 된 것이다. 워낙에 활동적인 사람이라 난생 처음으로 집에만 있어야하는 상황이 답답하기도 했지만 행복했다. 온 종일 혼자 집에 있으면서 태교일기도 쓰고 모빌도 만들었다. 혼자 있었지만 혼자가 아닌 기분, 생각보다 더 행복했다.
당시 삼둥이 엄마들 카톡방에서는 A병원 W교수님과 S병원 J교수님이 양대산맥으로 산모들의 신뢰와 지지를 받고 있었다. 마침 소아청소년과 교수님이 추천해준 분이 W교수님이라 난 A병원을 선택했다. 7주차 정도에 예약을 했는데 13주가 되어서야 추천 받은 산부인과 교수님 진료를 받을 수 있었다. 워낙에 빅3 병원 산부인과이기도 했고 '다태아 임신' 진료로 잘 알려진 의사이기에 만나기 까지 기다림이 필요했다.
진료실에 들어가 초음파 검사를 먼저 했고 교수님은 날 만나자마자 호쾌하게 인사하셨다.
"안녕하세요! 아주 젊으시네!! 자 초음파 볼게요."
"네 안녕하세요."
"오 삼둥이! 요즘 아주 많아!"
"네, 그쵸 저 아는 삼둥이 엄마들도 대부분 교수님한테 진료 받아요."
"그러니까! 요즘 왜 이렇게 삼둥이들이 많이 오는 거야! 나 바쁜데!!"
"ㅋㅋㅋ교수님 유명하시잖아요~ 다들 교수님 너무 좋아해요."
"우리 아기집 셋 모두 다 건강하네. 그리고 다들 주수에 맞는 크기로 잘 자라고 있어. 셋 다 이렇게 똑같이 비슷비슷하게 크기 어려운데 잘 키웠네! 엄마가 키도 아주 커서 삼둥이 잘 키울 수 있겠어!"
"그런가요? 교수님 그런데 제가 TOF 환자(선천성심장병, 할로씨4징) 인데 가능한가요?"
"어 그러니까. 내가 안 그래도 교수님이 써주신 의뢰서 받았는데 상관없어. 전혀. 걱정하지마. 그리고 아이들한테 혹시 유전될까 걱정되지? 걱정하지마. 이거 유전 안 돼. 그리고 지금 심장상태도 괜찮네. 잘 컸네 엄마가. 그러니까 셋 품어도 돼."
"정말요? 저 셋 다 건강하게 낳을 수 있을까요?"
"그럼! 그럼 셋 다 안 낳으려고 했어? 난 그럼 진료 안 봐~ 셋 다 낳을 수 있어! 낳아야지!"
교수님과의 진료는 나에게 크나큰 용기와 희망이 되었고 아이셋을 건강하게 지켜낼 수 있다는 나의 믿음에 단단한 자양분이 되어주었다. 교수님의 "지킬 수 있어." 라는 확신의 말은 명치 끝에 달려있는 거대한 덩어리가 쑤욱 소화되는 듯한 느낌이였다.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었다.
그래, 난 지킬 수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