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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지 못 할 회사 산행

회사 문화나 스타일이 무언가 특이하다고 느끼고 있을 때 돌아오는 토요일에 회사 단체 산행을 한다는 전체 공지가 월요일에 났습니다.

전에 다니던 회사들에서 이런 행사가 있었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실제로 경험하는 것은 처음이라 신기하기도 하고 웬만하면 참석해서 회사 사람들이랑 친해지고 분위기도 파악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 토요일에 가까운 친척동생 결혼식이 예정되어 있었고 저는 결혼식을 도와주기로 친척동생과 약속을 한 상태였습니다.

공지에도 강제사항이 아니라고 명시되어 전후 사정을 팀장과 인사팀에 설명하고 산행은 못 갈 수밖에 없다는 연락을 하고 나서 아쉽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인사팀장이 면담을 하자고 연락이 왔습니다..

보통 인사팀 면담은 심각한 문제가 생겼을 때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잔뜩 긴장하면서 인사팀장을 만났는데 산행을 꼭 가야 한다고 결혼식을 안 가면 안 되냐는 얘기를 하더군요.

처음에는 산행도 회사생활의 일부니까 어느 정도 강제성은 있겠다 싶어 나 대신 결혼식을 도와줄 다른 사람을 알아봤는데 친척동생이 저와 제일 가까워서 내가 꼭 해줬으면 좋겠다고 하기도 하고 토요일까지 남은 시간도 얼마 없어서 나를 대신할 사람을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다시 한번 인사팀장에게 결혼식을 안 갈 수 있는 방법을 알아봤는데 사정이 여의치 않아서 결혼식은 반드시 참석을 해야 하니 산행은 못 갈 거 같다고 죄송하다고 얘기를 했더니 네가 산행을 안 가면 회사생활에 불이익이 있을 텐데 괜찮겠냐고 무조건 가야 된다고 협박인지 설득인지 모를 말을 하더군요.

아무리 협박을 한다고 해도 내가 둘이 아닌 이상 산행을 갈 수가 없으니 결국 그 날 면담에서 

'저에게 중요한 선약이 있고 그 선약을 바꿀 수가 없어서 산행은 안타깝게도 참석하지 못한다.'

'산행에 참석하지 못해 아쉽고 죄송하다. 다음번에 꼭 참석하겠다'는 말을 여러 번 반복한 끝에 겨우 마무리가 되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회사가 이상하기보다 내가 생각보다 보수적인 회사 문화를 이해하지 못해서 일을 키웠구나 하는 반성도 하고 다음번에 다른 회사 모임에 참석해야겠다 생각하고 있었죠.

그런데 다시 인사팀에서 호출이 왔습니다.

내용인즉 인사팀 임원이 내가 산행에 참석하지 못하는 이유를 납득하지 못하니 직접 찾아와서 인사임원에서 이유를 설명하고 산행을 참석하지 못한다는 증빙서류도 내라더군요.

당연하게도 그런 얘기 중간중간에 신행 참석 안 하면 인사평가를 비롯한 회사 생활이 괴로워질 거라는 멘트는 양념으로 들어가 있었고요.


그 말을 듣고 지금까지 내가 잘 못 생각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렇게 할 거면 처음부터 반드시 참석해야 한다고 했어야 했는데 필참이라고 하면 회사가 올드해보니까 쿨한 회사처럼 보이려고 자유롭게 참석하라고 해놓고는 실제로는 무조건 참석하라고 하는 것도 우스웠고요.

설령 필참이라고 해도 중요한 집안일이 있으면 빠질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부분이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과 그 상황에서 임원이 나서서 ‘증빙서류를 갖고 나를 설득해봐’라는 것도 적잖이 당황스러웠습니다.

결혼식 참석에 증빙서류를 내라니… 거 참


내 말을 믿지 못하는 건지 아니면 나를 괴롭히고 싶었던 건지 아니면 둘 다 인지 모르겠지만 임원을 찾아가서 청첩장을 보여주며 인사팀장에게 했던 말을 대여섯 번 더 반복하고 정말 죄송하다는 말을 덧붙인 뒤 그리고 다음엔 꼭 참석하겠다는 말까지 임원에게 약속을 하고서야 겨우 끝이 났습니다. 


산행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회사에서 어디에서 나온 얘기인지 짐작은 가는, 나에 대한 안 좋은 소문들이 들리기 시작했는데 새로 들어온 경력직원은 회사에 대한 로열티가 없어 별로라는 식의 얘기였고 그때 정말로 속이 많이 상했었습니다.

그런 식의 험담을 들어서 속이 상한 것이 아니라 전에 다녔던 회사들보다 더 나은 회사라고 생각해서 희망을 갖고 이직한 회사가 전 회사들보다 어떤 면에서는 더 실망스럽고 답답한 조직 문화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었고 내가 회사를 보는 눈이 없나 하는 자괴감까지 들 정도로 실망을 많이 했던 일이었습니다.


그 일로 사람들이 괜히 대기업을 가고 싶어 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는데 대기업이라는 의미가 단순히 큰 회사라는 게 아니라 어느 정도 정돈된 조직문화, 인력관리와 인사시스템이 갖추어져 있다는 뜻이더군요.

그렇지 않은 중소기업들도 많지만 적지 않은 중소기업들은 그런 부분에 신경 쓸 여력이 없거나 아니면 신경을 써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해 시스템이나 문화가 아닌 사람으로 인사나 복지, 사람관리 업무를 메꾸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을 알았고요.

결국 대기업에 비해 부족한 부분이 많을 수밖에 없었고 그런 부분들 때문에 중소기업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이 힘들고 많은 상처를 받겠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만약 제 옆에 아무도 없었다면 정말로 힘들었을 시기에 제 옆에서 제 얘기를 들어주고 위로를 해준 사람들이 계셨기에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분들 덕분에 그 시기를 이겨낼 수 있었고 회사에 어느 정도 적응도 할 수 있었기에 이 글을 빌어 그분들께 다시 한번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자 합니다.

감사합니다.



#회사생활#산행#결혼식#소명#임원#조직문화#대기업#중소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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