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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미앙 Jun 10. 2021

20대와 사는 엄마

20대를 키우는 엄마들의육아 보고서

2021년 코로나의 긴 터널을 지나가던 3월, 오랜만에 어렵게 만난 친구들에게 푸념을 늘어놓았다. 아이들을 키우는 책은 그렇게 넘쳐나는데 20대 자녀를 둔 엄마들이 어떻게 하면 좋은지를 이야기해주는 책이 없는 거냐고. 
여전히 나와 같이 살며 그 아이들의 밥을 해주고 빨래를 해주는, 그렇게 수발을 받고 있는 20대의 아이들은 여태까지 내가 키우던 아이들이 아니었다. 마치 껍데기만 같고 속은 다른 외계인과 살고 있는 기분이 든다고 하면 내가 느끼는 시시 때때로의 슬프고 화나는 마음이 설명이 될까. 

어느덧 50대의 중후반을 지나며 불안정하게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의료보험을 지역보험으로 전환해야 하는 시점에서 인턴으로 다니는 딸애의 보험에 얹을 수 있을지를 물어보려고 건강보험공단에 전화를 하니 25세의 자녀는 부모 부양의무가 없다고 한다. 30세는 되어야 부모 부양의무가 생기는 거라고. 순간적으로 당황한 나는 그런 법이 어디 있냐고 따지지도 못하고 부양의무도 챙기지 못한 부모가 된 부끄럼으로 어버버 하며 전화를 끊고 말았다. 
20대는 법적으로 성인이고 대학도 보냈으니 부모의 의무를 어느 정도는 다했다고 생각하며 아이들의 독립을 고민하던 내게 20대는 여전히 부모의 부양을 받는 시기라는 사회적인 통념이 너무나 당황스러웠다. 
나의 20대는 어떠했던가를 생각하는 자체가 지금의 아이들에게 그런 비교를 하냐며 고리타분하다는  한마디에 밀쳐진다고 생각했는데 사회 역시 나보다 아이들의 편을 들어준 거 같았다. 
그러나 소심하게 변명해보자면 20대가 된 아이들과는 도대체가 대화가 안된다. 아이들은 아니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아이들과 대화하려고 매 순간 노력한다. 언제 들어오는지, 저녁은 몇 시에 먹을지, 방을 좀 치우고 빨래는 세탁기에 넣어달라고 내 딴에는 상냥하게 이야기하지만 아이들은 대꾸도 제대로 하지 않는다. 아이들을 향한 모든 대화의 시도는 잔소리이자 자신들을 쉬지도 못하게 하는 불필요한 소리로 매도된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밥을 차려주고 그것도 몇 번씩 밥 먹을 거냐고 물어봐가면서. 방을 치우고 아이들의 빨래를 세탁기에 돌리고 아이들의 옷장을 정리하고 빨래를 옷장에 넣어주는 일이다. 내가 하고 싶어 하는 일은 아니다. 사실 그런 일을 해주지 않아도 20대 자녀를 챙기지 않았다고 신문에 나거나 가십거리도 되지 않는다. 사회적 지탄도 받지 않는다. 오히려 알아서 하게 놔두세요, 너무 자녀에 연연해 하지 마세요 라고 할 것이다. 만일 이 글을 읽는 20대가 있다면 나는 내가 다 알아서 한다고 엄마가 자기를 괴롭혀서 힘들다고  할지도 모른다.  

나도 안다. 놔둬도 알아서 잘 산다는 것을. 그러나 아이들이 내가 차려주는 밥을 먹지 않으면 인스턴트나 배달 음식을 시켜서 먹을 것이요, 방안은 쓰레기통이 될 것이니 그때그때 조금이라도 챙겨야 나중에 내가 덜 힘이 들 것이고 무엇보다 내 속이 덜 아플 것이기에 나는 밥을 챙기고 방을 치운다. 

그렇게 아이들 수발에 애쓰며 30년 가까이 아이들을 키우느라 젊은 시절의 힘이 거의 소진되어 내가 봐도 나는 할머니가 되어간다.  이제는 기운도 없고 자신도 없다. 의기소침해져서 자신이 얼마나 초라한지를 느끼며 쓸쓸하고 허전하다. 
우습게도 20대와 사는 나의 힘듦을 위로해준 건 30년 가까이 헌신적으로 키웠다고 생각한 아이들이 아니라 우연히 입양하게 된 한 마리의 고양이다. 고양이는 5년 전에 보일러실의 새끼 고양이로 나타나서  내 뒤를 졸졸 따르며 내가 혼자가 아니라고 나를 위로해주었다. 

젊은 시절, 나는 유난히 독립적이었다. 유난히 독립적이던 내가 문득 태어나 분리불안으로 엉엉 우는 갓난쟁이의 엄청난 존재감에 익숙해지려 피나는 노력 끝에 이제는 아이들이 내 곁을 떠났다는 것을, 더 이상 내가 필요하지 않다는 현실 앞에서 오히려 내가 분리불안을 느끼며 힘들어하는 현실 앞에 마주 서게 된 것이다. 사실 코로나의 터널을 지나 오랜만에 만난 동기들이 아니라면 나는 그날도 마냥 고양이 등을 쓰다듬으며 빈 둥지 증후군을 이겨내려고 노력했으리라. 

글을 쓰려고 생각하니 너무나 많은 글들이 떠올라서 놀라기도 했고 한편으로 이 글이 아이들을 흉보거나 그들의 부족함을 탓하는 글이 되는 건 아닐지 걱정이 되기도 했다. 푸념과 글은 또 다른 문제이니까. 그럼에도 아이들을 걱정하는 나의 마음은 정말 무엇인지, 그리고 나의 고민과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 고민을 함께 하고 싶다는 마음이 너무나 커서 이 글을 쓰려고 한다. 내가 가려는 길이 여러 갈래의 길이어서 그 길을 이리저리 가볼 수 있다면 다행일거라는 생각을 하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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