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자녀와 함께 살기
그들과 살아가기 위한 생각들
사실 20대와 함께 사는 이야기를 쓰면서 어떻게 하면 20대와 사는 일을 잘할 수 있을 것인가 방법을 찾고 싶었다. 그런데 글을 쓰다 보니 20대와 함께 잘 사는 방법은 20대에게 걱정도 불만도 잔소리도 하지 않는 것,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사고체계를 가져야만 하는 것임을 알았을 때 20대에 대한 글을 더 쓸 수 없겠구나 생각했다.
사실 20대와 어떻게 함께 살 것인가에는 경제적인 문제가 깔려있다. 아이들을 독립시킬 경제적 여유가 없는 것이다. 큰 아이는 사귀는 사람이 있지만 결혼은 엄두가 안 나는 것 같고 둘째는 아예 무슨 돈으로 결혼을 하냐고 하니, 그것이 얼마나 부모 가슴에 못 박는 소리인지를 모르는 것 같다.
그러나 그 말들이 아주 틀린 것도 아니다. 그만큼 키워놨으면 알아서 살 궁리를 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하고 싶은데 주위를 둘러보면 자식들에게 무언가를 해주었다는 소리뿐이고 알아서 잘 살고 있다는 자식은 거의 없는 거 같으니 말이다.
그러다 보니 내 말에는 아이들을 듣게 하는 힘이 없다. 서로 신경은 날카로워지고 서로가 서로에게 하는 말은 가시가 송송 박힌다.
아이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다양한 지원을 하면 좋겠으나 형편도 되지 않고 그리고 그것이 과연 맞는 것일까 혼란스럽기만 하다.
아이들과 행복하게 싸우지 않고 지낼 수 있는 가장 평범한 방법은 일상에 있다. 토요일인 어제는 호박과 부추를 넣은 된장찌개에 밭에서 따온 상추와 함께 삼겹살을 구워 먹었다. 오늘은 일찍 장을 봐와서 점심엔 삶은 달걀을 넣은 콩국수와 만두를 먹고 저녁엔 새우를 직접 손질해서 갈릭 새우볶음과 소고기 양배추 샤브샤브를 만들어 무사히 저녁을 먹었다. 여전히 함께 밥을 먹지 않는 아들과 딸에게 두 번의 식탁을 차리고 나면 기운이 빠진다. 그래도 오늘은 잘 먹어주어 다행이다. 저녁이면 훌쩍 나가 밥을 먹고 오거나 도시락을 사 오는 아들이 어제저녁과 오늘 저녁은 집에서 밥을 먹었다.
그렇게 아이들이 먹은 저녁을 대강 치우고 혼자 앉아 남은 반찬에 와인 한잔, 날마다 이렇게 저녁을 늦게까지 먹다 보니 자꾸 아랫배가 나온다. 이제 다시 출근도 해야 하는데, 건강을 챙겨야 하는데...
출근하다 보면 아이들과 부딪힐 일도 적어질 것이다. 아이들이 알아서 밥을 챙겨 먹는 일도 많아지겠지, 그저 아프지만 말고 건강하기를. 내일 저녁엔 또 무슨 반찬을 해야 하는 걸까 생각하며 아이들의 미래에 대한 걱정을 잠시 내려놓는다. 잠시 해가 나는듯했는데 또 비가 내린다. 지구의 기후변화, 밥을 주는 길고양이들, 고기로 태어난 불쌍한 생명들, 나의 걱정도 끝이 없지만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다. 하다못해 고기를 조금 덜 먹으려고 해도 고기 없으면 밥을 먹지 않는 아이들과 부딪친다. 내가 주는 미앙이의 사료도, 길고양이의 사료들도 모두 육식성이니 누군가의 생명으로 이루어진 식사다.
<토지>에서 절에서 자란 길상은 생명에 대한 애정과 연민을 가지고 있다. 그가 성인이 되어 작은 새를 키우던 이야기가 생각난다. 어미를 잃은 새는 먹을 것을 거부하고 죽기를 작정한 거 같았다. 늦은 밤 새와 있던 길상은 새를 부른다. 순간 새가 대답을 하고 그리고 미친 듯이 먹이를 받아먹는다. 길상은 새의 몸이 온통 삶의 환희로 차있음을 느끼며 같이 희열을 느낀다. 절에서 자란 고아로서 자신의 삶을 존중받지 못한 길상의 삶이 작은 새 한 마리로 위로받던 순간이었다.
그리고 길상은 새를 위해 작은 벌레를 잡아오며 생명을 살리기 위해 살생을 하는 모순된 행동을 할 수밖에 없음을 깨닫는다. 삶은 그런 모순으로 가득 차 있음을. 아이들을 사랑하며 아이들을 위해 다 주고 언제가는 그렇게 벌레처럼 바스러질 존재임을 깨닫는 요즈음이다. 그러니 하루하루 아이들을 위해 그러나 좀 더 낮은 자리의 생명들을 생각하며 조심조심 살아야겠지. 오늘도 어디선가 생명이 태어나고 생명이 삶을 마감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