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할머니를 생각하는 일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할머니는 살아계시지는 않지만 내 일상 속에서 어디에든 있다. 몇 가지 사물이나 사건은 금방 매개가 되어 할머니를 끄집어 낸다.
월요일 밤 늦은 시간에 가요무대를 졸린 눈으로 봤던 기억이나 한밤중에 콧구멍에 종이뭉치를 넣다가 빠지지 않아 소동이 일어난 일, 생선을 발라주던 일, 사과를 숟가락을 긁어 먹이던 일, 재료가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맛있게 차려내었던 반찬(한참 뒤에야 그것이 명태껍질임을 알았다) 같은 것들이 그 기억이다.
나에게 할머니는 다정 그 자체이며, 나는 나이가 들고도 일상 속에서 대가가 요구되지 않는 다정을 만날 때면 할머니를 떠올린다.(가끔 애인이 다정할 때마다 할머니가 환생해 다시 나를 찾아온 것이 아닌가 생각하는데, 돌아가신 때와 애인의 출생연도를 비교해보면 틀린 추측인 듯하다.)
할머니는 다정하고 나와 많이 닮은 성격이었다. 정적이고 안정을 추구하고 요구하는 바를 직접적으로 발화하지 못하는. 어쩌면 그 시절 어른들이 다 그랬을지도 모르지만 할머니는 더더욱 그러한 듯했다. 그래서 나는 할머니를 많이 좋아했고, 너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시절 내가 읽던 책에서는 좋은 사람일 수록 일찍 명이 다했기 때문에, 할머니도 그런 이유로 일찍 돌아가신 게 아닌가 생각할 정도였다. 좋은 사람이라서.
하지만 나만의 생각이었을까, 내가 생각했던 할머니는 나만의 할머니였을까. 엄마와 할머니에 대해서 이야기하다 보면 할머니는 그렇게 한없이 착한 사람은 아니었던 듯하다. 물론 할머니가 특별히 며느리에게 못되게 굴었던 것은 아니지만, 시어머니와 며느리이기에 존해하는 갈등은 역시나 있었다. 출산 후 일터에 복귀한 엄마에게 날이 선 말을 한다든가, 자신이 말하지 않은 속마음을 며느리가 먼저 알아채주길 바라는 마음 같은 것이 그들의 갈등의 요소였다. 할머니는 그렇게 한없이 착한 사람은 아니었던 것이다. 이 점이 그렇게 충격적이지는 않지만, 할머니를 떠올리면 생겨나는 기억의 가지들이 하나 더 추가된 기분이었다.
모두에게 같은 사람은 없고, 같은 사람이 되고자 노력할 필요 또한 없다. 또 어떤 모습이 진짜인지 재단할 필요도 없다. 어쩌면 나를 아는 사람들에게는 나를 아는 사람들의 수만큼의 내가 존재할지도 모른다. 나와 엄마가 할머니를 다르게 기억하듯이. 하지만 엄마도 나도 할머니가 (정도는 다를지언정) 그립다. 가요무대, 생선가시, 명태껍질 같은 것이 지구상에서 사라지지 않는 한 할머니가 그리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