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진 커플의 데이트통장을 제3자가 쟁취하는 법
애인에게는 특별한 능력이 있다. 그것은 바로 미친듯이 잘 들어준다는 것이다. 내가 실없는 소리를 하든, 진지한 얘기를 하든, 비슷하지도 않은 성대모사를 하든, 뭐든지 잘 들어준다는 것이다. 내가 그의 애인이기 때문에 잘 들어주는 것은 아니다. 그의 타고난 성정 자체가 그런 것이다. 그가 타고난 슈퍼리스너임을 증명하는 한 가지 일화가 있다. 나는 이 일화를 주변인들에게 애인의 성격을 소개할 때 종종 쓰곤 한다.
애인이 대학교를 다닐 때의 이야기다. 합창단 활동을 하던 그는 기계공학을 전공했음에도 덕분에 여자인 친구들이 많았다. 타고난 성정이 유순하여 여자인 친구들과도 무난하게 어울리는 편이었고 그렇기에 그들의 연애 고민을 많이 들어줬다. 그 중 하나는 동아리 내 테너인 남학생과 사귀게 되었고 그 테너 역시 애인의 친구였다. 공교롭게도 커플 두 명과 절친하게 지내게 된 애인이 얻은 건, 두 배가 된 연애 상담이었다. 둘이 싸우기라도 하면 남자인 친구, 여자인 친구가 앞다투어 고민을 이야기해왔다.
이럴거면 그냥 회사원이 되지 말고 오은영 박사님처럼 될 걸 그랬어.
난*야, 그냥 들어.
그렇게 합창단 커플은 지리멸렬한 연애를 대학기간 내내 이어가다가 마침내 관계의 끝에 다다르게 되었는데 문제는 데이트 통장에 남은 비용이었다.
“됐어. 이거 너 가져.”
“나도 됐어. 오빠가 가져.”
둘은 의미 없는 실랑이를 하다가
“그래, 이거 민*야, 네가 해.”
“우리 둘 다 받기 싫으니까 그래, 민* 선배가 가져.”
해서 결국 데이트통장에 남은 6,000원 남짓의 잔액을 애인이 가지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그걸로 결국 햄버거를 사먹었다나 뭐라나.
이 이야기의 교훈은 씨씨는 하지 말자, 데이트 통장은 가급적 만들지 말자, 가 아니다. 남의 말을 잘 들어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 정도가 이 이야기의 교훈이다. 말하려는 이는 많지만, 잘 들어주는 이는 흔치 않다. 단순히 말소리를 듣는 것이 다가 아니라, 경청하고 공감하는 태도로 진심을 보이면 언젠간 높은 신뢰를 살 수 있다. 그 결과로 이렇듯, 커플이 되지 않고도 데이트통장 잔액을 쟁취할 수 있는 행운이 생긴다.
투머치토커로 사는 나에게는 좋은 리스너가 정말 귀한 존재다. 하물며 브런치에서조차 말이 많은데, 우연히 이곳에 발길이 닿아 여기까지 읽어주신, 소중한 리스너가 되어주신 선생님들께 감사하다. 선생님들도 남의 커플 데이트비용을 쟁취하는 행운이 있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