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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곱째별 Dec 27. 2022

꼬마 정읍댁의 정원일기 7

할머니 사랑




매일 아침 9시까지 도착하기 위해 차를 몬다. 달리는 내내 설레지 않는다. 

누런 대나무 숲 앞집  초록대문을 열고 들어간다. 방문요양 태그를 하고 이불을 털어 널고 쓸고 닦고 빨래를 하고 밥을 차리고 설거지를 하고…. 집에서도 안 하던 일을 밖에서 하고 있다. 어르신과의 사이는 괜찮다. 다만 무료한 날들의 연속이었다. 창의적인 일을 하던 내가, 일상생활을 잘 못하는 내가, 단지 돈을 벌기 위해 이 일을 할 것까진 없는데 왜 이러고 있는지 모르겠는 나날이었다.      


하도 심심해서 정리수납전문가과정을 온라인으로 수강했다. 

정리정돈·풍수지리 등은 20여 년간 이미 수십 권의 책을 읽은 터라 굳이 돈 들여가며 배울 필요는 없었지만 이 시기에 자격증 하나라도 따놓자는 심산이었다. 그런데 배우다 보니 옷 개는 법, 수건 접는 법 등 잔재미가 생겼다. 비움 실천을 하는 내게는 이제 버릴 게 별로 없다. 하지만 바로바로 실습할 수 있는 어르신 댁이 있지 않은가. 마침 어르신도 손댈 수 없이 뒤죽박죽인 서랍장을 정리하고 싶어 하셨다.       


정리의 4단계 원칙인 ‘처분-제자리-분류-수납’에 따라 안방의 TV 놓은 서랍장 네 개를 싹 정리했다. 

거실 장식장의 그릇과 옷 서랍 네 개와 싱크대도 차례로 정리를 했다. 냉장고는 청소와 물품 정리 외에는, 괜히 버렸다가는 가져갔다고 오해를 살 수 있는 가장 민감한 공간이므로 더 이상 손대지 않는다. 못 입는 옷가지들과 유효기간 지난 화장품이나 약품들을 버리고 깨끗하게 구획하고 정리한 서랍들을 보자 잠시 기분이 밝아졌다. 시력이 안 좋은 어르신이 말끔한 정리 상태를 못 보시는 게 아쉬워 손으로 더듬어 만져보시게 했다. 그러나 정리가 시들해지자 다시 지루한 나날이었다.      


그러던 어느 맑은 날, 어르신의 요 커버를 벗겼다. 

실로 시쳐야 하는 요였는데 내가 그걸 할 수 있다고 하자 어르신은 ‘장하다’고 하셨다. 

실밥을 뜯어 세탁을 하고 말려, 쓸고 닦은 방에 요 껍데기를 솜 아래위에 가지런히 놓고 돗바늘에 굵은 무명실을 꿰었다. 그 사이 어르신은 생강을 심는다고 마당으로 나가셨다.    

  

조용한 방 안에서 한 땀 한 땀 요를 꿰매는데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자그마한 방을 가득 메운  목화솜. 솜을 틀어 얇은 싸개로 싸맨 후, 공단과 면으로 된 위아래 홑청을 빨아서 풀을 먹여 다듬잇돌에 방망이질을 해서 이불과 요를 시치셨던 엄마. 뿌연 형광등 아래에서 엄마가 이불과 요를 꾸미던 그 저녁 시간은 시계가 정지한 것처럼 차분하고 고요했다. 

수선화가 교화인 명문여고에서 발레와 수예를 배운 엄마는 중학교 2학년이던 열네 살 때 교회에서 만나 10년을 연애하고, 결혼 직전 쫄딱 망한 부잣집 남자와 단칸방에서 어린것들과 살았다. 그러면서 당시에 유행하던 과외를 못 시키는 대신 나를 직접 가르쳐 국민학교 1학년 첫 시험에 네 과목 올백을 맞게 하셨다. 엄마는 매일 아침 내 머리를 양 갈래로 묶어 고대기로 말아주셨다. 할머니가 부자 여동생 네서 얻어다 주신 한 학년 위 친척의 옷으로 나는 전교에서 옷을 제일 잘 입는 아이였다. 학교 아무도 우리의 가난을 몰랐다.      


외아들의 첫 아이인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넘치는 사랑을 받았다. 아기 때 방바닥에 놓인 적이 없다고 한다. 아빠 아래로 네 명의 고모들이 번갈아 안으려 순서를 기다렸고, 할아버지는 고모들에게 내 발을 입에 넣으면 당시 크림빵 한 개 값인 10원씩을 준다고 하셨단다. 외아들밖에 모르시던 할머니는 첫 손주인 나를 끔찍이도 사랑하셨다. 

“아이고~ 우리 강아지.”

언제나 내 궁둥이를 두드리며 할머니가 하시던 말씀이었다.     


중학교 2학년이던 열네 살에 청천벽력으로 엄마가 돌아가시자, 그때까지 교회만 다니시던 할머니는 내 도시락에 온 정성을 다하셨다. 노란 달걀을 풀어 주황색 당근과 초록색 파를 송송 다져 달걀말이를 하고 분홍색 소시지를 달걀 물에 묻혀 부쳐주셨다. 내 도시락 반찬의 그 고운 색은 친구 엄마가 보고 감탄할 정도였다. 소풍날이면 다진 소고기를 양념해서 김밥을 싸주셨는데 김 위에 달걀지단을 깔아 입이 터질 정도로 커다란 김밥의 맛은 지금도 입 안 가득 배부르게 떠오른다. 할머니는 내가 스물여덟 살이 될 때까지 매일 아침식탁을 차려놓으셨다. 하지만 나는 매일 늦게 일어났고 학교로 직장으로 젖은 머리칼 말릴 새도 없이 뛰쳐나가면서 그 밥을 먹지 않았다.   

그렇게 자란 나는 전형적인 여성 역할이라고 여겨지던 집안 살림을 등한시했다. 티도 안 나는 비생산적인 일이 싫었다. 그런 내가 지금 젊어서도 열심히 안 하던 살림을 남의 집에 와서 하고 있는 것이었다.      

 

바깥에서 어르신의 호미질 소리가 들렸다. 갑자기 눈물방울이 투두둑 떨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숨죽여 울었다. 울음은 오열로 변했다. 요에 눈물이 떨어질까 봐 얼굴을 당기면서도 바느질을 멈추지 않았다. 대체 왜 나는 이 낯선 고장에서 모르는 할머니 요를 꿰매고 있는 걸까? 그토록 절대적으로 나를 사랑해 주시던 엄마와 할머니께는 밥상 한 번 차려드린 적이 없는데 매일 남의 할머니 밥상을 차리다니, 아무리 엄마나 할머니가 그리워도 30여 년간 글만 쓰다가 엉뚱하게 노인을 위한 일을 전적으로 하는 건 어울리지 않는 게 아닌가? 내 돌봄의 근저에는 과연 무엇이 있는 것일까?      


할머니들을 보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노긋노긋해졌다. 

원주에도 별담리에도 할머니가 계셨다. 그분들은 나를 며느리 삼고 싶어 하셨다. 차라리 딸 삼자고 하셨다면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양어머니와 양딸처럼 오래오래 사이좋게 지낼 수 있었을 지도. 그러나 며느리는 아들과 내가 잘 맞아야 이루어질 수 있다. 무엇보다 내가 원하는 관계는 무조건 사랑하는 할머니와 손녀 혹은 어머니와 딸이었지 한국 전통사회의 시어머니와 며느리라는 상하관계가 아니었다. 어르신과 내가 잘 지내는 이유는 대상자와 요양보호사라는 대등함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서로 할 일과 못 할 일을 구분할 줄 알고, 무리한 것을 요구하지 않고, 하더라도 거절할 수 있다. 어르신이 생강을 심고 내가 요를 꿰매는 것처럼. 그러나 규정에 따라 깍듯하게 전산 처리되는 우리 사이에 깊은 정이 쌓이기는 쉽지 않다. 정은 거래로 만들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두 달간 매일 찾아갔던 원주 할머니를 기억한다. 

나는 며느리처럼 모셨던 별담리 어머니를 그리워한다. 

그리고 지금 나는 요양보호사로 대상자 어르신을 돌보고 있다. 

이분께도 정이 들까 봐 겁이 난다. 헤어짐은 마르지 않는 눈물과 함께 가슴이 매섭게 아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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