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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동거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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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곱째별 Jun 22. 2024

동거 열여드렛날

콩이 쾌유 일지-비 오는 날 촉촉한 추억


어젯밤 스트레칭을 하는 도중 잠이 들었나 보다.

휴대폰엔 다 된 유튜브 영상이 멈춰 있다.

얼마나 피곤했으면.......

새벽 여섯 시쯤 일어났더니 밖에 비가 온 듯 땅이 축축해 보였다.

어제 2층 창틀에 청개구리가 올라앉았더니 습기가 올라왔었구나.

화장실 다녀오면서도 중문 커튼을 젖히지 않았다.

좀 더 자야지...


두 시간쯤 후 쿵쾅 버르적거리는 소리에

"알았어~~."

서둘러 일어나 스트레칭을 한다.

동거 이후 팔이 다시 아프다. 오른쪽에서 왼쪽까지. 잠에서 깨고 나면 악 소리 날 때도 있다. 콩이 몸무게는 6.3kg에서 조금 더 늘어난 듯하다. 얼마 전 이웃이 콩이를 보더니 살이 쪘다고 했다. 그런 콩이를 안고 들고 나니 팔에 무리가 간 듯하다. 그래도 일어나 연푸른 셔츠를 걸쳤다.


콩이는 어제부터 내가 현관에서 신을 신으면 높이 뛰어오르기 시작했다.

소리 지르며 혼을 내도 제 다리가 다쳤는지 잊어버린 모양이다.

그러다 착지할 때 충격으로 다시 금이 가면 안 되는데 말이다.


08:40 콩이를 안고 내려가 정원을 지나 포장도로 위에 내려놓았다.

콩이 소변보는 장소가 조금 바뀌었다.

며칠 전부터 맞은편 집 주황색 장미에게 비료를 준다.

오늘은 비 온 뒤 축축한 흙이 좋은지 흙을 헤집고 다닌다. 이때까지만 해도 상상을 못 했다.


몇 달 전 농로 옆에 가로수를 식재했다. 받쳐놓은 나무 홈이 정교해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오늘 보니 그중 한 그루가 자귀나무 옆에 심겨 있었다. 자귀나무가 먼저 그 자리에 있었을 텐데 간격 때문이겠지만 꼭 그 자리여야 했을까? 그 나무가 무성하게 자라면 자귀나무는 햇빛을 못 받아 힘들어할 것이다. 심는 사람이 다른 나무 생각도 해야지. 아마 식재할 때는 자귀나무 잎이 없어 존재감이 없었겠지만.


910m 걷고 집 앞에서 콩이를 안아 들었다.

으악-

다리와 배에 시커먼 흙탕물이 잔뜩 묻었다.

콩이는 포메라니안. 털이 북실북실한 개다.

09:00 콩이를 안고 집안 욕실까지 들어왔다.

욕조 안에 넣고 샤워기로 흙물을 씻어냈다. 앞다리 상처 부위에 물이 닿으면 안 되기 때문에 최대한 조심조심해야 했다. 흙물을 다 씻어내고는 지난여름 콩이 목욕시키라고 주인이 주신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주었다.

쓰던 패드를 욕실에 깔고 그 위에 서게 한 뒤 상처 부위에 소독약을 뿌리고 발라주었다.

그리고 물그릇에 물을 받아 마시게 했다.


덕분에 이틀 전 옮겨준 낡은 이불 위에 패드를 두 장, 바닥에도 패드를 두 장 깔았다.

깔끔한 새 보금자리에 콩이를 옮겨주었다.

그리고 보송보송 마른 사료그릇에 사료를 100g 못 되게 담아 손으로 먹여주었다. 중간에 목말라하길래 물그릇을 갖다 주었더니  마시고 나서도 또 먹었다. 오늘은 싹 다 먹었다.

콩이가 기분이 좋은지 깨끗한 패드 위에 네 다리 쭉 펴고 엎드렸다.

09:15 오전 임무 완료


이제 내 기분도 좋게 해야겠다.

우선 더운물 샤워.

틀면 나오는 더운물 펑펑 쓰다가 온수 쓸 때마다 보일러 켜고 LPG값 걱정을 하게 되다니....... 그래도 안정감을 위해 기꺼이.


오랜만에 펌핑 저울에서 몸무게를 재봤더니 느낌이 딱 맞았다.

지난겨울 42kg까지 감량해서 이러다 큰일 나는 거 아닌가 덜컥 겁이 나서 요리학원에 등록했다. 그렇게 두 달 한식과 브런치 실기를 배워서 만드는 족족 매일 먹어서 찌웠다. 이젠 몸무게가 44.4~44.9kg일 때 몸이 가뿐함을 알게 되었다.


샤워하는 김에 빨래.

먼저 콩이와 닿을 때 입는 연푸른 셔츠는 세면대에 비누칠해 담가둔 후 손빨래. 콩이 퇴원하는 날부터 입었으니 18일째다. 아무리 하루 두 번 걸친다 해도 무척 오래 입었다.

콩이 닦아준 걸레 같은 수건은 샤워하는 물로 따로 손빨래.

샤워 후 사용한 수건과 춘추용 올리브그린 잠옷과 면소재 옷을 세탁기에. 세탁기는 일주일에 한두 번 사용한다.


다음은 의상.

오랜만에 타이트한 옷을 입기로 했다. 10년 전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사 온 TODOS LOS CAMINOS SANTIAGO 검정 티셔츠와 산티아고 순례길 내내 입었던 얇고 빨간 면바지를 입었는데 어쩐지 바지가 흡족하지 않다. 분홍과 푸른색이 가느다란 스트라이프 핫팬츠를 입었다. 서울에선 아무렇지도 않은데 시골에선 절대 밖에 입고 나갈 수 없는 짧은 길이. 옷장을 열어보니 한 군데서 산 옷들이 그득하다.


2012~2013년에 서울 부암동 선先을 만났다. 그땐 그곳이 윤동주 시인의 언덕배기에 있었다. '한국기행'을 제작할 당시, 수고한 나에게 선물한다고 처음 샀던 감청색에 하늘색(연파랑) 면 점퍼스커트. 당시에 십만 원이 훌쩍 넘고 이십만 원 근처였던 고가여서 망설였는데, 함께 구경하던 옷 좀 볼 줄 아는 친구가 "사라, 사. 널 위해 그것도 못 사냐." 부추기는 바람에 산 그 치마는 해마다 소녀스럽고 싶을 때 한두 번은 꼭 입는 애정템이다.

선 주인은 한국에서 관련 학과 전공 후 영국 세인트마틴 대학에서 의상을 공부하고 와서 한국 동대문과 부암동에서 사업과 상업을 겸하는 재능 충만한 디자이너다. 그 동네에서 10년 이상 살았다. 동네 의상실이었던 선의 낙낙한 옷을 입으면서부터 내 옷 중 타이트한 옷은 거의 없다. 서울을 떠난 지 4년 되었지만 가끔 서울에 갔다가 저녁때쯤 그 동네를 지나면 어김없이 그곳에 들른다. 선의 옷은 현재 내 외출복의 8~90%를 차지하고 있다.  

 

면 점퍼스커트 외에도 여름 면 감청색과 푸른색 리넨 치마바지, 리넨 재색 치마, 회색 리넨 원피스, 데님 청치마, 검정 리본 원피스, 감청색 짧은 면 원피스, 여름이면 줄곧 걸치는 감청색 면 로브. 그리고 겨울 내내 단벌인 아랫단 라인이 출렁이는 회색 원피스.

베이지색 리넨 재킷, 감청색 체크 울 블라우스, 감청색과 카키색 긴 누빔조끼, 감청색 털 조끼, 흰 티셔츠 긴 팔 두 장과 반 팔, 리본과 프릴 달린 감청색 면 티셔츠 두 장, 청색 여름 바지, 검정 면바지. 겨우내 입는 재색 울 폴라. 회색 니트 조끼.

흰색부터 감청색까지 그러데이션 실크 스카프. 여름 밀짚모자.

모두 서울에서 살 때 샀던 것들이다.


출강하면서 산 건  감청색 울 재킷, 초록색 울과 텐셀 폴라, 초록색과 파랑 체크 리넨 셔츠, 초록과 파랑 잔 꽃무늬가 있는 아이보리 면 블라우스, 흰색 면 블라우스 겸 셔츠, 초록색 리넨 바지, 감청색 누빔 조끼와 스커트.

그러고 보니 내가 리넨과 면을 참 좋아하는구나.  

 

선의 옷은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언제 입어도 폼이 난다. 비움실천을 한 지 5년, 새 옷을 사는 게 망설여질 때가 많지만 그래도 꼭 사야 하는 옷이 있을 때 선을 찾는다. 마음에 쏙 들고 좋은 제품을 사서 오래 입는 것도 비움실천의 응용이다. 상하농장 달걀의 신선도처럼 좋은 옷은 마음도 건강하게 한다.


작년에는 여름 이불을 그곳에서 샀다. 지인의 제품을 팔아주고 있었다. 면 100 수인데 하도 좋아서 최근 선물할 곳이 있어 연락했더니, 상당히 친절하게 연결해 주었다. 자기 제품도 아닌 남의 걸 그렇게 이쁘게 팔아주는 그 고운 마음에 감동하여 지금 이 글을 쓰는 지도 모른다. 작년에 그 이불을 택배로 받았을 때의 감동이 아직도 생생하다. 유유상종이란 그런 것이다. 선이나 바뜰이나 예쁜 주인이 정성껏 제품을 생산해서 소비자에게 고이 전달해 준다. 그럴 때 물건은 마음이 된다. 그렇게 마음이 담긴 물건을 쓸 때 행복하다. 어쩌면 그게 공예품을 좋아하는 내 성향의 기원인지 모르겠다. 한 땀 한 땀 정성을 다한 무엇은 감동을 준다.


지난 3월, 방문한 릴리가 내 사진이 꽂혀있는 동판 '자화상'을 유심히 보더니 한 말씀하셨다.


"별님은 뒷모습도 사랑스러운 걸 본인이 아나 몰라?

그리고 이 작품 정말 잘 만들었다. 정말 잘 만든 작품이야."


작가가 자신을 만들었으니 잘 만들었을 수밖에. 그때 오브제에 담긴 어떤 무언가를 알아보는 릴리의 안목에 내심 놀랐었다. 오~ 그 사진 속 나는 사랑에 빠져 있었으므로. 이구.


옷도 마음에 드는 걸로 입었으니 마른 걸레에 세정수를 뿌려 밀대에 끼고 바닥을 닦았다. 아무리 청소를 깨끗하게 해도 집안에 진동하는 개 냄새가 문제인데, 방향제가 없으니 어제 다 쓴 아토 크림과 치우리버터 로션 뚜껑을 열어 테이블 위에 놓았다. 뭔가 비워지니 기분이 좋고 거기서 향이 나니 더 좋다.


오랜만에 라디오를 틀어 클래식을 듣는다. 요 며칠 라디오 음악과 멘트 소리도 감당하지 못할 만큼 신경이 예민해 있었다. 이제 다시 원래 생활로 점점 돌아가고 있다.

똑또르르 똑또르르.

양철통에 떨어지는 빗소리처럼 이 균일한 공기의 무게와 밀도가 유지되기를. 부디 아무 일도 일어나지 말기를.


비가 와 밀가루를 반죽해 두었다. 얼결에 샀는데 박력분이라 어쩔 줄 몰라했던 걸 200ml 계량컵만큼 반죽해 컵에 넣어 비닐에 씌워 한 시간 냉장고에 두었다. 어제 끓여 먹고 남은 된장국에 물을 더 붓고 호박, 양파를 더 썰어 넣고 끓이다 밀가루 반죽을 뜯어 넣었다. 이른 바 수제비. 박력분인데도 쫄깃쫄깃 맛있다.


음~ 19시인데 비가 점점 더 온다.

상처에 물이 닿으면 안 되니 오늘 콩이 저녁 배변 산책은 못하겠다. 어쩌나 ㅜㅜ

그런데 생각해 보니 밖에서 묶여있을 때 콩이는 하루 한 번 산책시킬 때 배변을 했다. 요즘처럼 하루 두 번씩 12시간 간격으로 산책하지 않았다. 퇴원 후에는 48시간도 참았으니 오늘 밤은 잘 넘길 수 있을 터. 내일 새벽에 일찍 나가면 될 것이다.

밀가루 푼 계량컵으로 사료를 100g 조금 안 되게 퍼서 콩이에게 주었다. 손바닥에 올려놓고 핥아먹게 했다. 개버릇 잘못 들이는 게 아니라 넥칼라 때문에 여간 불편한 게 아니어서다. 싹 먹었다.

19:10 저녁 임무 완수



거실 커튼이 거센 바람에 날려 개망초 꽂아놓은 양념통을 쓰러뜨렸다.

이제 감상 그만~.



역시 세상은 이 평화를 가만두지 않는다.

잠시 후 알게 된 소식..!

https://v.daum.net/v/20240622202105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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