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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곱째별 Jul 04. 2024

동거 서른 날

콩이 쾌유 일지-선풍기


선택은 늘 자신이 한다.


오전 8시 50분에 콩이를 안고 내려가 산책을 하며 소변을 보게 하고 물을 마시게 하고 빗질을 하고 안고 올라와 소독하고 사료 100g을 준다. 남기기에 손으로 남김없이 다 먹인다.

9시 10분이면 콩이의 오전 일과를 정리할 수 있다.


30일째 이 기록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루 두 번씩 꼬박꼬박 소변을 보게 하고 사료 100g을 먹였다는 사실은 인간인 내가 동거하는 개를 책임 있게 돌보고 있다는 증거다. 만에 하나 이상 증세가 있을 때 과거를 찾아볼 수 있어야 한다. 매일 당연했던 일상이 병중에는 기록의 의무로 남는다. 병상 발치에 있는 비닐 씌운 종이에 적힌 내용처럼.  


몇 만 장의 내 족적을 옮겨 담았다. 그럼에도 7년을 다 담진 못했다.

기록과 정리는 어느정도의 보람과 만족에 이어 종국에는 비움으로 연결될 것이다.


콩이에게 칫솔 간식 한 개를 주자 먹느라 정신이 없다. 그사이 잠시 외출했다.

유기농 밀가루로 빵을 만든다는 가게에 가서 생크림 식빵을 한 봉지 샀다. 다디단 밤과자는 덤이었다.  

흰 토끼 검은 토끼 그릇 세트를 선물 받은 곳에 석 달 닷새 만에 갔다. 옷걸이는 없었고 정수기 필터는 있었다. 출강을 해야 유기농 매장에 가니 당분간은 갈 일이 없다. 그래도 집에 달걀과 두부와 우유는 채워둬야 한다. 시중 마트에도 동물복지 달걀이나 국산콩 두부, 유기농 우유가 충분히 있다. 적게 먹으니까 좋은 걸 먹어도 된다. 과일이 필요한데, 지난 6월 기차역과 기차역 사이에 처음 사 본 애플수박이 매우 맛있었다. 그런데 훨씬 작은 마트에서 산 거라 대형마트엔 없었다. 혼자선 커다란 수박 한 통을 살 수 없다. 할인에 할인을 거듭하는 것들 코너로 간다. 한두 주에 한 번 장을 보기 때문에 조절을 해야 한다. 은연 중에 양 손으로 한 번에 옮길 수 있을 만큼만 사는 게 기준이다.  


금방 돌아와 잠시 쉬는데 무던한 콩이가 낑낑댄다.

9시간 만에 데리고 나갔다.

짧은 산책에도 소변을 꽤 본다.


생크림 식빵 제일 작은 조각을 먹어보았다. 촉촉하고 말랑하고 쫄깃한 게, 점원이 그냥 먹어도 맛있다고 권할 만했다.  

콩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본다. 하지만 이 실내에 올라온 이래 인간이 먹는 걸 개에게 준 적 없다. 지금은 병중이니까. 철저한 급식이 중요하다.

 

일도 휴식도 못하는 어중간한 시간에 친구의 소설을 잘게 잘게 쪼개 읽는다.

일단 손에 잡으면 아무것도 못한 채 다른 일이 마비될까 걱정했던 바와는 다르게.

숨이 가빠지고 긴장이 되어서 한꺼번에 읽을 수가 없다. 문장 하나하나가 3차원과 공감각을 널뛰어서 쉬이 읽을 수 있는 게 단 한 줄도 없다. MRI로 뇌회로 중 문장력을 찍을 수 있다면 그와 나의 뇌구조는 AI도 만들 수 있는 은나노급 얼개와 사막의 성근 모래알 간격 정도 될까?


자연광에 육안으로 볼 수 있는 마지막 채광까지 책을 읽고는 숨을 몰아 쉰다.


문득 콩이가 궁금하다.

저녁 산책이 일러 사료를 주지 않았다.

100g을 주었더니 혼자 게눈 감추듯 먹었다.

먹는 사이 캠핑용 선풍기를 틀어주었다. 복도처럼 된 차양과 연결된 현관 창은 매우 작아 중문을 열어놓아도 통풍이 잘 되지 않는다. 낮엔 괜찮은데 밤이 되면 거실 창문을 잠그기 때문이다. 내게 쏘이는 선풍기는 틀까 말까 한 번 더 생각해도 콩이에게는  망설이지 않는다. 그래서 배부르고 시원한 콩이.


19:30 콩이 일과 끝.

그리고 이제부터 내 일과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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