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의 한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어린이용 발판"이란 플라스틱 상자를 보게 되었다. 층수 버튼에 키가 안 닿는 어린이들을 위한 편의라 생각되는데 이런 편의 시설을 처음 보게 되어서 놀라운 마음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문득 내가 처음 어린이용 발판을 사용하던 기억이 났다.
1960년대 후반 어머니는 나를 데리고 세브란스 병원을 정기적으로 방문하고 있었다.
내가 다섯 살쯤 처음 방문하게 된 신촌 세브란스 병원 X-RAY 검사실에서 어린이용 발판을 사용했는데, 그 당시 나는 결핵에 걸려서 X-RAY를 찍으려면 키가 안 닿아 매번 어린이용 나무상자를 놓고 올라가서 X-RAY를 촬영했었다.
병원은 1962년 6월 5일 신축된 현대식 종합병원으로 내부가 하얗고 매우 커 보였는 데 어린 내 눈에 무척이나 특이했던 건 이동 통로가 계단이 아닌 긴 나선형 경사로(휠체어환자)를 처음 보게 된 것이다. 그 경사로는 양측에 60~70년 대 유행했던 불투명 유리가 각각의 조그만 사각형 창문에 끼워져 있었고 자연광이 효과적으로 활용되어 햇살이 굴절 투과를 해서 경사로를 내리비치면 그림자 문양이 매우 신비로웠다. 또한 그 경사로 공간이 효율적으로 활용되는 밝고 넓은 느낌도 주었다. 지금도 미적만족도를 높이 멋진 공간이란 느낌을 아직도 갖고 있다. 불투명 유리는 투명도 유지와 개인프라이버시 보호와 공간을 분리하면서도 공간활용도를 높이는 역할을 하는 데 지금도 개인병원의 공간분리용으로 인테리어를 한 곳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아! 병원 공간을 너무 예찬하다 보니 본론에서 옆길로 새어 버렸다.
세브란스 병원엔 어머니의 먼 친척뻘 희영이 이모가 수간호원으로 계셨는데 언제나 나를 앞세우고 1순위로 어머니와 어린 나의 편의를 도왔다. 어머니는 나로 인한 걱정으로 심적 부담감이 큰 상태였는데(그 당시 결핵은 잘 낫지도 않는 죽을병이었다) 희영이 이모가 그 완충역할을 훌륭히 해주는 분이셨다. 나의 상태가 그 당시 어느 정도였는지 잘 알 길은 없으나 의사 선생님께서 이 아이와 생활하는 모든 가족들은 다 병원에 와서 검진을 받으라고 해서 근처에 살던 외갓집 식구들이 총동원되어서 병원 검사를 받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아마도 가까이에 있는 어른들이 보균자라고 생각했던 듯싶다. 하지만 진짜 원인 제공을 한 보균자는 따로 있었으니....
어머니는 꾸준하게 나를 데리고 다니면서도 일절 불편한 내색을 하지 않으셨고 온화한 얼굴로 나를 대해주해 셔 어린 나는 어머니의 심정을 헤아릴 수가 없었다.
그러나 마지막 결과를 나이가 지긋한 여의사선생님이 말해주던 그날을 난 기억 한다. 이제 다 괜찮아졌고 어른이 되어서도 큰 문제없이 일상생활을 잘해나갈 수 있느니 너무 염려 안 하셔도 된다고... 순간 어머니는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시고 소리 내어 우셨다. 의사의 말도, 어머니의 눈물의 의미도 잘 이해는 안 갔지만 어머니에게 내가 엄청난 죄인이 된 것 같았고 그만큼 어머니가 날 너무나 사랑한다는 느낌도 받았다.
1940년대 초반 어린 소녀인 어머니는 세브란스 병원으로 매일 같이 도시락 배달을 다녔다.
그곳의 위치는 남대문 밖 복숭아골이라 불렸던 지금의 서울역 앞 연세대학교 재단빌딩 (남대문로 5가 84-11번지) 자리에 세워진 세브란스 기념병원이란 이름의 최초의 근대식 종합병원이었다.
당시 할머니께서는 자궁암(지금도 암이면 젤로 무서운 병이지만 그 당시에는 정말 죽는 병이었다) 진단으로 수술을 받고 할아버지께서 매일같이 직장에서 퇴근을 하시고 할머니를 돌보고 계셨다. 그 도시락은 할아버지의 저녁식사였다. 어린 소녀인 어머니는 매일매일 조마조마하며 광화문에서 전차를 타고 서울역에 내려서 병원을 다니셨는데, 도시락을 할아버지께 전달하고 할머니를 잠시 뵙고 나오면 전차의 종점이 서울역이라 타고 왔던 전차를 다시 타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전차 차장과도 친하게 되어 서로의 근황을 이야기하게 되셨다고 한다. 어린 소녀는 어머니의 죽음을 맞닥뜨리게 될까 봐 숨죽이며 울고 다녔고 전차차장은 그런 소녀를 십분 이해한다며 위로해주셨다고 한다.
20여 년 전 어머니의 죽음을 마주하게 될까 봐 울고 다니던 서울역 앞 세브란스 병원을 20년 후 같은 이름의 신촌 다른 장소에서 자식의 죽음과 마주하게 될까 봐 숨죽이며 마음 졸이던 어머니는 얼마나 이 상황들이 힘들고 아이러니하셨을까?
그저 나는
1940년대 전차차장님도, 1960년대 희영이 이모도 모두가 어머니의 마음을 지켜주고 달래주셔서 너무나 너무나 감사할 따름이다. 감사합니다. 전차차장님. 그리고 희영이 이모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