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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운 거 아니야, 진짜야

호두턱과 빨간 코의 진심, 스승의 날 즈음에 전합니다.

by 시트러스

운동회 하다 우는 선생님이 있다?

그런 사람이 있다고?

유감스럽지만, 내가 바로 ‘그런 사람’을 담당하고 있다.


슬플 때 눈물이 나는 건 그러려니 하겠다.

그런데 슬픔과 어떤 상관도 없는 순간,

눈물이 나면 정말 당황스럽다.


유튜브 영상 보던 중,

적막한 짧은 정적 뒤로 피아노 연주가 시작될 때.


어렵사리 시간을 내어 간 쌍둥이들 재롱잔치,

무대에서 엄마를 발견한 아이들이 힘차게 손을 흔들 때.


시와 때를 가리지 않고

예상치 못한 눈물이 터져 나올 때마다 당황한다.


이 약한 눈물샘은 어디서 왔나. 멀리 갈 것도 없다.

우리 부모님을 보라.

티브이를 보다가 그다지 슬프지도 않은 장면에서

어김없이 들려오는 훌쩍거리는 소리.

(부모님은 '인간 극장'류 프로그램에 약하시다.)


"아빠! 엄마 봐봐~ 이게 머시 슬프다고..."

하지만 대답은 들을 수 없다.

아빠는 이미 눈물을 티슈로 막으며,

소리를 원천 봉쇄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며칠 전도 그랬다.


근무하는 학교에서 운동회를 했다.

나는 통솔 교사로 4학년 아이들과 함께 있었다.


공 던지기 할 때 튕겨 나온 공 주워주기.

반별 달리기 할 때 줄 세우기.

경기 없을 때 그늘 자리 찾아주기.

전혀 막중하지 않은 임무다.


"선생님 홍팀 응원할 거예요? 청팀 응원할 거예요?"

"선생님은 이기는 팀 응원할 거야."

그저, 아이들과 재밌게 경기를 보고 있었다.


그러다 운동회의 하이라이트, 계주가 시작되었다.

나는 깜짝 놀랐다.

아니, 저렇게 바람같이 달려 나가는 아이가

그 민혁이가 맞나?


영어 시간에 하도 뺀질거려서,

"민혁아아악! 선생님이 너 이름 몇 번째 부르니?!"

"세 번째요."

하고 대답해서 날 더 열받게 했던 그 민혁이?


어, 위험하다.

나는 갑자기 눈과 코가 시큰거려서

이를 꽉 물고 호두턱을 만들었다.


너는 여기서 이렇게 빛나는 아이구나.

이렇게 힘차게 달릴 수 있는 아이구나.

참, 멋있다.


교실에서 미처 발견하지 못한,

그 맹렬한 모습에는

마음을 울컥하게 하는 뭔가가 있었다.


위기였지만 잘 넘겼던 내게, 더 큰 위기가 닥쳐왔다.


은우가 뛰고 있었다.

은우는 선천적으로 한쪽 귀가 없이 태어났다.

다른 쪽 귀도 좀 작고 일반적인 위치보다 아래쪽에 있다.

귀가 잘 안 들려 말도 살짝 어눌하다.


하지만 나는 은우에게 수업 시간에 '못해요.'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없다.

모든 활동에 열심히 참여하고,

밝게 웃으며 수업을 잘 들어주는 친구다.


그래서 은우에게는 눈치껏

역할극의 주인공 역할을 준다든지,

게임할 때 대표로 주사위를 던지게 한다든지 하는

배려 아닌 배려만 했다.


동정의 시선이 아닌,

함께 어울려 공부하는 친구 중 한 명을

바라보는 시선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지금, 그 은우가 달리고 있다.


계주 마지막 주자라니,

이건 정말 아이들이 준 특혜가 아닐 수 없다.

은우가 계주를 뛰어보고 싶다고 했을까.

자세한 내막은 나도 모른다.


아이들이 모두 함성을 지르며 은우 옆에서 달리고 있다.

청팀 주자는 일찌감치 결승선에 들어와서,

오히려 파란 바통을 흔들며 은우를 응원하고 있었다.

“은우야!! 여기야!!!”


주위를 둘러보니 다들 은우에게 소리를 지르고 있다.

친구들, 다른 학년 학생들, 학부모님들까지 한 마음이었다.


홍팀 바통을 든 은우는, 환하게 웃으며

“우와아아!!” 소리를 지르며

트랙 밖에서 같이 뛰는 친구들과 열심히 뛴다.


나도 안 주려고 애쓴 특혜를 이렇게 주다니!

소리 지르며 난리가 난 배신자(?) 아이들을,

나도 웃으며 쳐다보았다.


아이들이 만들어 준 이 멋진 운동회를 보며,

어쩐지 울면 안 될 것 같았다.


아직은 쌀쌀한 4월, 맑고 쾌청한 하늘 아래,

아이들이 모두 한 마음으로 달리고 있다.

나는 급히 모자 아래로

호두턱과 빨간 코를 감춰야 했다.

예전에 특수반 선생님께 여쭤본 적이 있다.

"통합 수업 시간에 특수 친구들을 어떻게 대하면 좋을까요?"

"그냥 똑같이 대해주세요.

같이 교실에 앉아 있는 것으로도,

그 친구들에게는 큰 의미가 있어요.

다른 친구들 방해만 않으면 그저 수업을 듣게 해 주세요."

들려주신 답은 같은 공간에 어울려 있게 해 달라는 말씀이었다.


사실, 40분을 가만히 앉아 있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과연 저 친구들에게 그렇게 큰 의미가 있는 걸까.’

의문이 드는 날도 있었다.


하지만 오늘, 친구들과 함께 달리는 은우를 보니

그 말씀이 마음 깊이 이해가 됐다.

나와 조금 다른 친구와, 그 다름을 받아들이고

나아가 자신들이 줄 수 있는 특혜는

얼마든 내어주는 친구들.


'함께 있다'는 것.

그것은 단순한 동석이 아니라,

존재를 인정받는 가장 중요한 시작점일 것이다.


그 모든 시간이

우리 사회를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는 과정임을,

나 역시도 배운다.


이 아이들과 같은 배움의 공간에 있는 지금,

나는 매일 작고 뜨거운 기적을 만난다.


은우야, 정말 멋졌어.

민혁아, 너 진짜 잘 달리더라.


어어, 선생님 운 거 아니야. 햇볕에 타서 그래.

진짜야. 코가 빨갛다고? 코 푼 거 아냐.

코도... 그냥 많이 탔어.


다음 시간에 민혁이를 만나면 등이라도 팡팡 두드려 줘야겠다.

은우는 기회를 봐서 모르는 척 어깨를 안아줘야지.


다름을 품고 함께하는 시간.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조금씩 서로를 자라게 하고 있다.






※ 아동의 개인정보 보호를 위해, 본문에 나오는 모든 이름은 가명을 썼음을 밝힙니다.


[이 글이 다음 페이지와 브런치스토리 에디터픽에 소개되었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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