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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다이어트할 마음이 없었습니다만

교장선생님의 건강 증진 클럽

by 시트러스

1. 뜻밖의 초대장 - 건강 증진 클럽의 시작

새 학교에 적응하느라 분주하던 작년 학기 초, 보건 선생님께 전체 메시지가 왔다.

"건강 증진 클럽에 가입하세요!"

각자 목표를 설정한 다음 지키기를 하실 분은 쪽지를 달라는 메시지였다.

'이런 것도 다 하나?' 고개를 갸웃거리며 읽는데 끝 내용이 눈에 들어왔다.

"이 메시지는 교장 선생님의 권유로 작성되었습니다."

어쩐지 '이 편지는 영국에서 시작되어...'로 시작하는 행운의 편지를 읽는 기분이었다.

그때만 해도 내가 그 행운의 편지의 수신자가 되리라고는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점심시간. 당시 학교는 급식실 현대화 공사 전이어서 점심을 따로 먹는 장소가 없었다.

그냥 교무실 테이블에서 교장, 교감선생님 포함 비담임 교과 선생님들이 다 같이 먹었다.

원래도 종갓집 장손 집안의 딸로서 열 명 넘는 식구가 함께 밥 먹는 것에는 익숙했다.

"영어 선생님은 어쩜 그렇게 매일 옷이 바뀌세요?"

"네? 아.. 네네." 익숙하다고 했지, 좋아한다고는 안 했다.

나는 그냥 옷을 좋아해 열심히 차려입는다. 하지만, 이런 관심이 매우 수줍기 때문에 옆자리 선생님께 다급히 아무 말이나 건넸다. 옆은 아뿔싸, 보건 선생님이셨다.

"선생님, 다이어트 클럽은 어떤 거예요?" 모두들 빵 터지셨다. "아오, 선생님 다이어트 아니고 건강! 증진!"

"어이쿠, 죄송합니다." 덕분에 화제는 잘 넘어갔고, 분위기도 화기애애했다.


2. 운동할 마음은 없었지만 - 헬스장 풀장착

다음 날, 건강 증진 클럽 목표치를 기입하라는 구글 시트 링크가 왔다.

그냥 아무 말이나 했을 뿐인데... 아니, 내가 가입한다고 했던가?

하지만 아직 친해지지도 않은 선생님께 처음부터 거절 메시지를 드리기가 조심스러웠다.

[한 달에 0.5 킬로그램 빼기, 매일 운동하기]로 써서 냈다.

다음 날 아침, 체중 재러 보건실로 내려오라는 메시지가 왔다.

클럽 운영 기간은 3개월. 참가비로 3만 원을 내고, 매달 목표 달성 시 만원씩 돌려받는다.

달성을 못하면 오히려 만원을 더 내야 하는 강력한 체계였다. 그렇게 나와 (돈과)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당시 나는 과체중도 저체중도 아닌 그냥 사람답게 살 만한 체중이었다.

체지방, 비만도 등등 보통, 건강, 양호가 나오는 보통의 몸이었다. 즉, 살을 빼기 어려운 상태.

자칫 잘못하면 수분과 근육만 빠져서 늙어 보이는 구간이었다.

우리 집의 생각하는 의자, 실내 자전거에 앉아 운동하기로 했다. 처음에는 핸드폰을 보며 대충 30분 앉아 있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확신의 J형인 나는 몸이 근질거리기 시작했다.


그냥 집에서 혼자 하는 운동이지만 갖춰 입기 좋아하는 내게 운동복도 예외란 없었다.

헤어밴드에 기능성 티와 레깅스가 속속 도착했다. 복장만 보면 헬스장에 당장 나가도 될 것 같다.

"여보, 운동하고 올게." "그래 잘 다녀와." 나는 도보로 1분 거리 헬스장에 도착했다.

운동선수에 빙의해 스트레칭을 하고 실내 자전거에 올랐다.


유튜브로 40분 영상을 찾았다. 음악과 자전거로 달리는 화면, 시간만 나오는 영상이었다.

자막을 눈으로 따라가며 인터벌 사이클링을 시작했다. 자막은 내 운동 코치이자, 친구, 버팀목이었다.

[아이디: 개뚱띠- 오늘도 같이 달리니 좋습니다.] 등등. 나도 자막을 보고 울고 웃으며 의지를 다졌다.


3. 고인물이 되어간다 - 운동 과몰입

첫 달 중간 점검 기간이 왔다. 가장 가벼운 옷을 입고 출근하였다. 잠시 고민한 끝에 시계도 풀러 놓고 보건실로 체중을 재러 갔다.

1킬로그램이 빠졌다. 그리고 나를 제외한 모든 선생님들이 벌금을 내셨다.

교장선생님은 건강상의 이유로 아예 탈퇴하셨다. "예에? 탈퇴가 되는 거였어요?"

그렇게 '교장선생님 없는 교장선생님의 건강 증진 클럽'은 계속 운영되었다.


한 달을 더 운동했다. 슬슬 옷이 안 맞기 시작했다. 허리를 쫌 매고 다녀야 했다.

얼굴에서는 급격히 살이 빠지고 더 못생겨지기 시작했다.

이번 달에는 2킬로그램이 빠졌고, 나와 선생님 한 분을 빼면 모두 벌금행이었다.

남편이 걱정을 하기 시작했다. "얼마나 더 못 생겨지려고 그러는 거야!"

물론, 이렇게까지 말은 안 했다. 하지만 방구석 헬스장으로 향하는 내게 보내는 눈빛을 보면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어딘가 글러먹은 INFJ로서, 계획하고 목표로 한 일은 그냥 해야만 하는 성격이다.

운동 시간이 되면 이제 풀장착은 커녕 일단 다급히 티셔츠와 반바지만 입고 자전거에 올랐다.

"역시 고인물..." 남편이 고개를 절레절레했다.

나는 나만의 자전거 길을 간다. 개뚱띠님도, 나도 파이팅!


4. 벌금과 상금의 전쟁 - 너의 체중은

마지막 달이 되었다. 이제 스커트가 돌아갔다. 마지막 체중재는 날, 체급 판정을 받는 복싱 선수들의 심정이 이해가 되었다. 당연히 물도 마시지 않았고, 침이라도 뱉어야 하나... 비장하게 보건실로 향했다.

이미 건강 증진은 내 관심사에서 멀어졌고, 벌금도 상금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딱히 할 필요도 없었던 감량만이 목표였다.

"와.. 선생님 1킬로 더 빠지셨네요." 그렇게 석 달만에 4킬로그램이 빠졌다.

생님들이 그동안 냈던 벌금이 모이니 어마어마한 액수가 되었다. "네? 얼마라고요?"

총금액을 들은 선생님 모두 다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그 돈이면 전 교직원 회식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는 서로를 리스펙 하게 되었다. "그렇게 운동이 싫었어요?" 서로 덕담? 이 오가는 가운데 홀로 목표 달성자로서 좀 민망했다.

결국 교장선생님의 지원금과 벌금으로 우리는 다 같이 피자 파티를 했다. 넘치는 예산으로 심지어 팥빙수도 인당 하나씩 먹었다. 그날 바로 한 달 치 1킬로그램을 회복한 건 물론이었다.


5. 돌아온 4킬로그램 - 그럼에도 다시

1년간 그럭저럭 유지한 체중은 야금야금 제 자리를 찾아갔고, 오늘 올라간 체중계는 당당히 원상 복구했음을 알렸다.

시원해진 날씨에 운동을 다시 시작하려 한다. 이번에는 좀 더 천천히, 꾸준히.

과한 J형 실행력이 조금 걱정되긴 하지만, 운동에는 언제나 나름의 성취감과 중독성이 있다.

땀방울 사이로 스며드는 그 청량함은, 하루의 무게를 단숨에 씻어내는 스포츠 음료수 한 모금 같다.


우선은, 남편이 숨겨놓은 실내 자전거부터 찾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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