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흘렀다. 희영은 맛없어도 맛있는 척하는 어른으로 자랐다. 희영은 누군가가 내어주는 것이라면 눈앞의 것을 다 먹는 사람이 되었다. 그렇게 음식을, 타인의 관심을, 지루한 대화를, 섯부른 친절을 맛있는 척 했다. 타인의 접근을 주는대로 먹었다. 누군가는 희영을 불쾌하게 했고 누군가는 희영을 함부로 대했으며 누군가는 희영이 원치 않는 것을 대접했고 누군가는 희영을 지치게 했다. 그러나 희영은 웃었다. 희영은 친절했다. 희영은 착했다. 희영은 배려했다. 이것이 희영에게는 세상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였다.
현수가 만들어내는 서툰 요리를, 희영은 늘 맛있게 먹어주었다. 현수가 제안하는 데이트를, 희영은 늘 즐거워했다. 현수가 하는 말을, 희영은 모두 귀담아 들어주었다. 현수에게 희영은 싫은 소리를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현수는 희영이 무던하고 긍정적이며 사랑스러운 사람이겠거니 생각했다.
희영이 운동을 마치고 오는 길이었다. 현수는 지하철역으로 마중을 나갔다. 희영의 옆에는 웬 남자가 서 있었다. 그 남자는 마중을 나온 현수를 보고 당황한 듯 시선을 피했다. 당황한 것은 현수도 마찬가지였다. 희영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늘 그렇듯이 웃으며 현수를 맞았다. 남자는 서둘러 사라졌다. 현수는 희영에게 물었다.
“누구야?”
“응.. 운동 동호회 사람인데, 나를 데려다 주겠대.”
“그걸 거절하지도 않았어?”
“방향도 같고 해서.. 몇 번 괜찮다고 해도.. 딱 잘라 거절하기도 뭐하고.. 그래서 그냥 왔어.”
현수는 싫은 소리 한 번 하지 않는 희영을 떠올렸다. 늘 얼굴에 배어 있는 미소를 떠올렸다. 몸에 붙은 친절과 배려를 떠올렸다. 타인을 향한 배려를 떠올렸다. 그 사랑스러움이 희영을 마중나온 현수를 화나게 했다. 현수는 화를 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현수의 느닷없는 화 마저도 수긍하며 받아줄 희영임을 알았다. 현수는 이 문제의 규모와 뿌리가 심상치 않음을 예감했다.
며칠이 지난 후 현수는 희영을 집에 초대했다. 그리고 식사를 대접했다. 설렁탕이었다. 한숟갈 뜬 희영은 당황했다. 설렁탕은 싱겁고 단순해서 뜨거운 물 같았다. 희영은 익숙한 미션을 떠올렸다. 맛있게 먹어야 한다. 그리고 다 먹어야 한다. 웃음을 가득 띄운 희영이 식사를 마칠 때쯤 현수가 말했다.
“희영아. 이 설렁탕은 내가 마장동에 가서 직접 구한 한우 뼈를 이틀 동안 우려낸 거야. 조미료는 하나도 넣지 않았어. 이 설렁탕이 맛없고 싱겁다는 걸 나도 알아.”
희영은 자신의 미션이 실패했음을 알았다. 현수에게 물었다.
“티.. 났어?”
현수는 희영에게 말했다.
“그건 중요하지 않아. 희영아. 맛없어하더라도, 다 먹지 않더라도 나는 하나도 섭섭하지 않아. 사랑해. 나는 너와 많은 시간을 보내고 감정을 나누고 마음을 다 내어주고도 늘 모잘라. 빈혈이 있는 너를 생각하며 요리해봤어. 세상의 맛없는 음식들과 마찬가지로 싱겁고 간이 안맞지만, 너를 향한 간절함만은 맵고 짜고 달고 시고 쓴 음식이야.”
현수는 말을 이어나갔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처럼 너를 바라보고 만나고 이야기하겠지만, 거기에 담긴 간절함만큼은 세상 유일한 사람일거야.”
그 때 희영은 문득 소녀의 떡볶이가 떠올랐다. 싱겁고 맛없는 그 떡볶이.
희영은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비로소, 소녀의 떡볶이를 다 먹었다. 소녀가 희영에게 준 것은 싱겁고 맛없는 떡볶이가 아니었다. 떡볶이에 담긴 시간과 마음과 사랑과 기대와 간절함과 따뜻함은 너무 맵고 짜고 달고 시고 썼다. 그래서 소화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던 것이다.
이제 희영은 맛없는 음식을 억지로 먹지 않는다. 희영은 더 이상 아무에게나 친절하게 대하지 않는다. 희영은 생각했다. 너무 맵고 짜고 달고 시고 쓴 마음이야말로 맛이 있다는 걸. 세상 모든 음식들과 같아 보이더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