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심한 싸움이 싫다. 전쟁은 더 싫다. 하지만 누군가는 말한다. 심한 싸움과 전쟁은 인류 역사상 있었고 양상과 시기만 다르지 피할 수 없는 인간 역사의 결과물 중 하나라는, 나도 부분적으로 이해는 한다. 인간들의 본성이 때론어쩔수 없는 실수투성이와 욕심 덩어리라. 근데 사람들이 죽는 것은 싫다. 특히 스마트폰 시대에 생생하게 화면으로 양쪽 나라의 사망자를 매일보는 것은 '스마트고문'처럼 느껴진다.
난 폭력적 영화도 못 본다. 아니 안 본다. 스트레스가 심해져 거친 언어를 쓰는 사람들 기분은 이해는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있는 그룹에서 과격한 언행으로 여러 사람들의 일상을 깨고 위협적인 분위기를 만들기 때문에 폭력적 사람들은 멀리한다. 알다시피 그런 사람들 옆엔 항상 뒤따라오는 안좋은 여파가 있기 때문이다. 해서 지금 이런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상황을 보는 자체가 불편하며 양쪽 다 사망자가 늘어나고 있어 마음이 아프다.
난 정치, 경제, 군사 전문가가 아니라서 비판하는데 한계가 있다. 그래도 하나는 안다. 십자군 전쟁이 양념 전쟁이었다는 것, 911가 누군가의 시나리오였다는 것과우-러 전쟁도 훗 날 정확한 평가를 받을 것이다.
나에겐 우크라이나 친구가 있다.
2014년 우크라이나 친구를 만났다. 파키스탄 이슬라마바드에서였다. 우크라이나 출생이었지만 대학은 모스크바에서 나왔고 후에 프랑스 국적 남자와 결혼한 여자였지만 자기 뿌리는 항상 우크라이나라고자부심을 가진 여자였다. 강한 성격의 소유자였고 지적인 면이 두드러졌었다.
그녀와 난 시트콤 드라마에서 만났다. 그녀는 주연이었고 난 조연을 받았다. 시트콤을 만드는 도중 미국 여자와 중국 여자 배우들이 본국들로 돌아가는 일이 생겼고 그 자리를 우리 둘이 채워야했다.
음악, 예술, TV 드라마... 이런 분위기가 한국과 다른 파키스탄에서 외국인 배우들을 TV 시트콤에서 채운다는 자체가 흥미 있었다.무슨 내용일까도 궁금했다.
근데 난 그들이 찾는 중국인이 아니었고 연기는 대학원 과정에서 잠깐 수업에서 했을 뿐 햇병아리였다. 감독 겸 시나리오 작가는 나에게 영어와 우르드를 쓰는 조연 역이며 대사를 되도록 줄여준다고 했다. 부담도 없을 것 같고 한국에서 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무료감을 느낄 때였고수입도 필요할 때라 경험 삼아서 하고 싶다고 했다. 조연이라 주연들 촬영 구경하면서 어떻게 시트콤 드라마가 만들어지는지 보고 싶었다. 이슬라마바드 시의 문화, 교육, 문화, 연주를 주관하는 단체에서 만난 사람 중 한 사람이 마침 방송인들을 잘 알고 있었고 시트콤 PD가 극동아시아쪽 얼굴의 여자 조연이필요하다는급조를했는데 어떨결에 내 연락처를 줘서 생긴 일들이다. 시트콤 제작 과정을 보는 것은 재밌고 신기하기도 했다. 촬영의 재미도 딱 삼일..힘들기 시작했다. 3분짜리 짧은 대사를 하기 위해 반나절을 기다리거나 여러 명과 같이 찍는 2분짜리 장면을 몇 시간 동안 반복해서 될 때까지 찍는 것이었다. 페이도 적고 난 성격도 급하고..ㅎㅎㅎ
그래도 거기서 감독, 작가, 피디, 카메라맨 1,2,3,4, 도구, 화장해주는 사람, 헤어 해주는 사람.... 대본 출력해 외우는 것... 뭐 이런 새로운 경험이 재밌었다. 우린 4부작부터 줄거리를 약간 틀어 자연스럽게 투입되었는데 8부작 만들고 투자자들이 재밌다고 더 늘리자 해서 ...16부작으로 간다고 했다. 그러더니 나중엔 36부작까지 늘었다. 16부작 마칠 찰나에 1회 에피소드부터 방송이 나가기 시작했는데 반응이 좋다 뭐 이래서 36부작까지 간다고 했다.
난 점점 하기가 싫어졌다. 조연이고 페이는 적고 반나절, 또는 하루 종일.. 어떨 땐 밤 12시까지 촬영을 했다. 주 2회 몇 시간씩 하기로 PD와 확약하고 시작한건데 제작진 모두 수십명이 같이 하는 시트콤은 개인시간을 정확히 맞추기 아주 어려운 작업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근데 그 때 시트콤 TV 감독이 날 잘 보고 있었다. 왜냐면 난 시키는 대로 했다. "언제까지 뭐 준비해서 와라"하면 그렇게 했다. 난 공동체에선 그것이 당연하다고 한국땅에서 배웠다. 근데 꼭 그렇게 감독 지시를 따르면 그 자리엔 나밖에 없었다 ㅎㅎㅎ. 아무도 없었다.몇 분 뒤 감독이 왔고 " 아니, 왜 외국인만큼 다들 시간 개념이 없냐"라고 전화로 호통을 치면 30명 가까운 총 인원들이 2~3시간 안에 서서히 촬영장에 얼굴들을 내밀었다. 난 엄청난 인내심을 갖고 있는 감독님을 돕고 싶었다.나만이라도 제 시간에 나타나자..였다. 다른 주연급 국민 배우급들이 다른 프로그램과 겹치면 나머지 사람들이 기다려 그들과 시간을 맞춰야 했다. 한국 아줌마 성격에 짜증도 났는데 그냥 즐기기로 했다. 숨못쉬는 한국 생활에서 막 벗어난 색다른 인생 수업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기다리는 시간엔 아무도 없는 카페테리아에 가 냉장고 안에 있는 간식들을 하나씩 혼자 꺼내 먹었다. 감독이 쉬는 시간엔 그렇게 하라고 했는데 나만 열심히 먹고 있었다 ㅎㅎㅎ. 인스턴트 라면도 끓여 먹고 초콜릿도 먹고 스마트 폰도 하고 대본도 외우면서, 아... 근데 대사 쬐금만 준다고 약속해서 조연한다고 했는데 비싼 국민 주연급들이 늦게 촬영장에 나타나는 일이 빈번해지다보니 감독이 조연들 몇 명 모아 재밌는 장면 찍는 횟수가 늘어났다. 아... 내 대사가 늘고 있었다. 도망가고 싶었다. 거기에 감독은또 날 칭찬까지 했다. " 처음엔 카메라 1,2,3 중 뭘 봐야하는지도 모르고 큐!...하면 연기가 1초 늦게 나오더니 ...요즘 많이 자연스러워졌네요. 더 재밌는 대사를 넣어 시트콤 재미를 늘려야겠어요 "...뭐 이렇게 진행되고 있었다. 아이구~~. 시트콤 몇회 조연 대타로 경험하고 빠지는게 계획이었는데..인생이 뭐 계획대로 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때 우크라이나 친구와 많이 친해졌다. 그녀는 연기를 참 잘 했다. 타고난 재능도 다분했다. 몇 개의 외국어를 하고 자기의 화려한 예복까지 촬영에 필요하다면 입고 적극적으로 연기했다.그녀는 시트콤의 꽃이었다. 조금씩 그녀가 부럽고 못하는 내 연기 부분을 그녀를 통해 배우려고 했다. 근데 한계는 있었다 ㅎㅎㅎ.
그녀는 어떤 즉흥 연기라도 감독이 말만하면 0.5초에 만들어 냈다. 하지만 난 그런 연기가 자동으로 안나왔다. 자연스런 감정 표현이 굳어있었다. 경쟁과 지시와 순종에 길들여진 나의 한국 삶이 날 이렇게 만들었을까...뭐 그런 생각도 해봤다. 어쨌든 그녀는 나보다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처음 우린 정말 잠깐 몇 주의 짧은 촬영이라고 생각했는데 36부작까지 길어질 줄 몰랐다. 장장 촬영이일 년 6개월까지 길어졌다 ㅎㅎㅎ.이제 생각해보면 사람들 만나는 재미로 한 것 같다. 내 인생에 이런 국영 TV 시트콤 조연 자리가 또오겠는가......
해서 ㅎㅎ.
근데 요즘 우-러 전쟁을 뉴스로 듣고 그 우크라이나 친구에게 몇 주전 전화를 해봤다. 그녀는 지금 영국 아일랜드에서 늦깎이 석사과정을 하면서 병원일을 하고 있다. 근데 그녀는 현재의 우크라이나 상황 때문에 또 모스크바에 있는 어머니와 오빠 때문에 전화선에서 울고 있었다......
예전에 그녀와 같이 촬영 할 때그녀는 우크라이나 대사관 주최 행사에 날 초대해줘서 우크라이나 민속춤을 봤다. 우크라이나 여자들의 춤, 옷들이 매력적이라고느꼈다. 어떻게 그렇게 계속 빙빙도는 춤을 오래 추냐고 했더니 무대에 올랐던 우크라이나 여성들은 우리 문화고 어렸을때부터 해봐서 어렵지 않다고 했다. 더 놀라운 것은 전문 무용수가 아니라 우크라이나 일반인들이 모여 연습한 민속춤 공연이었는데 정말 잘했고 다들 미인에 속했다. 난 누가 한국 전통 춤 시키면 외국에서 뭘 할 수 있을까..챙피했다 ㅎㅎㅎ.
근데 우크라이나 친구 그녀는 요즘 우울하게 우크라이나에 보낼 성금을 모으고 있다고 했다.
그녀와 같이 있던 시절,그녀는 우크라이나 음식을 맛볼 수 있는 그들의 명절날에 날 초대했다. 구운 고기를 먹을 때 통째로 마늘파를 왼손에 잡고 먹는다고 해서 따라 해 보았다. 맛있었다. 생각보다 편했고 고기와 먹으니 덜 느끼해서 좋았다. 한국과 비슷했다. 그때 그 자리에서 만났던 우크라이나인들이 지금은 우크라이나와 여러 나라에 퍼져 울고 있다. 마음이 아프다. 그녀의 식구는 그녀가 젊었을 때 모스크바로 이주했기 때문에 가족들은 모두 러시아의 모스크바에 살고 있다고 했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와 역사적으로 많은 영향을 주고받은 문화 환경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에겐 러시아 제자가 있다.
어느 날 러시아 외교관 한 분이 나한테 전화를 했다. 그의 아들을 가르쳐 달라는 것이었다. 피아노 기초와 기초 발성과 러시아와 영어노래를 영어로 가르치는 일이었다. 그 아이를 그의 집에서 만났다. 파키스탄은 치안 때문에 외교관 자녀 지도는 꼭
방문을 해야 했다.
난 대학생 때 러시아로 유학을 가고 싶었다. 유학 비가 저렴해서였다. 그 때 큰 집 오빠가 모스크바에서 한국인 학생들을 대학과 연결시켜주는 한국 유학원의 모스크바 분점 일을 하고 있었다. 해서 러시아 유학을 꿈꿨던 난 1년 정도 러시아어를 종로에 있는 어학원에 가서 배운 적이 있었다.
90년대 초 러시아가 급변하고 있을 때였다. 근데 큰 집 오빠가 모스크바의 밤거리에서 러시아 마피아에게 살해당하는 일을 당했다. 너무충격이었다. 큰집 오빠가 화장 가루로 한국에돌아왔고 그 후모스크바에 유학을 가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그래도 러시아어만은 재밌게 배웠다고 생각했는데 20년 전 배운 러시아어는 진짜 러시아인들을 만났을 땐 인사말만 할 수 있었고 나머지 의사소통은 영어로만 대화했다 ㅎㅎㅎ. 머리가 굳은 것을 통감했다ㅎㅎㅎ.
러시아 소년의 이름은 D로 시작했다. 난 그의 이름이 익숙했다. 내가 읽었던 러시아 문학 작품에선 흔한 러시아 이름 중 하나였다. 해서 꼭 러시아 문학 작품의 한 인물이 내가 읽었던 먼지 낀 책에서 걸어 나와 내 인생에 들어와 나와 같이 놀아주는 느낌이었다.
인사 차 방문 간 첫날 D는 특이했다. 잘 생긴 얼굴이었고 흰 피부를 가졌었다. 근데 뭔가 겉돌았다. 들어오는 방문틀에 손과 다리를 벌려서 기어 올라갔다. 신체 활동이 왕성했던 내 아들도 유치부와 초등 저학년 때 똑같은 행동을 했기 때문에 8세 남자아이의 심리를 쉽게 읽을 수 있었다. 근데 D에겐 뭔가가 달랐다. 부분적으로 무력감 같은 것 있었고 그것을 통제 못하는 D의 어머니가 힘들어 하셨다.
그 소년의 어머니는 굉장한 미인이셨고 높은 외교관의 부인으로서 손색이 없어 보였다. 말과 행동, 옷차림까지 우아했고 발레리나 같다는 느낌을 주는 여성이었다. 내가 갈 때마다 러시아 사람들이 마시는 홍차와 초콜릿을 항상 주셨다. 그녀의 따뜻한 배려의 행동들은 항상 나에게 안도감을 주었다. 그녀가 건네주는 홍차가 담긴 흰색 찻잔의 디자인은단순했고 그녀의 심플 세련된 집안 인테리어 디자인과 색채와 잘 어울렸다.
그녀는 한국 학부모님과 똑같이 자식을 사랑하는 어머니였고 아이의 미래에 대해 항상 준비하며 방과 후 손수 학교 공부를 가르치시고 있었다. 학교 공부가 끝나면 러시아 학제에 맞는 학년 공부를 D의 어머니가 직접가르치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D의 일과는 한국 대치동 초딩과 같았다. 엄청난 양이었다. 근데 D는 스포츠를 좋아했다.
인간은 완벽하지 않다. 해서 완벽한 부모도 자식도 교사도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우린 그 자리에서 서로에게 최선을 다하려 노력할 뿐이라고 생각한다.
D에겐누나가 하나 있었다고 한다. 그녀가 11세가 되었을 때 캐나다에 잠깐 여행 갈 일이 있었는데 교통사고로 그 딸을 잃었다고 했다. 나도 만 19세에 한국에서 내 어머니를 교통사고로 잃었다. 나의 어머니 경우는 음주 운전자가 문제였다.
D 학생의 어머니의 얘기를 계속 들었다. 첫 딸을 잃고 1년은 말을 거의 안 했다고 했다. 주변 사람들이 자기 앞에서 첫 딸 이름조차 부르기를 피했다고 했다. 그녀는 울음을 터뜨렸다. 나도 눈물이 나왔다.
그 사고 때 D는 D어머니의 뱃속에 있었다고 했다.
나도 내 어머니를 잃고 3년을 울었다. 사고를 낸 음주 운전자는 우리 가족에게 찾아와 잘못했다는 한 마디도 안 했다. 3차 골절 수술 도중 어머니는 정신을 잃었고 28일 만에 중환자실에서 돌아가셨다. 3차 수술 시작 전 바쁜 파트타임 마취의는 당뇨가 있는 우리 어머니에게 과하게 마취를 했다. 수술 차트를 달라는 우리 가족의 호소가 있었다. 그 후 내 어머니의 병원 차트는 사라졌다.
90년대 초 한국이 그랬다.
D가 불렀던 노래 책
D와나는 친해졌다. 섬세한 성격을 가진 D였다. 피아노 실력도 꾸준히 늘었다. 피아노 레슨 첫 몇 주는 쉽진 않았다. 어머니에 대한 저항을 나에게도 쓰려고 했다. 교통사고로 떠난 딸을 D안에서 매꾸려는 어머니의 넘친 걱정과 사랑이 D의 심리적 성장을 막고 있다고 생각했다.
대화가 닫혀진 심리적 상태의 D와 깊은 대화를 하나씩 해 D의 마음을 밝게 하는게 중요했다. 자존감, 성취감을 만드는 과정을 거치면서 친근감도 서로 생겼다. 가끔 D가 자기가 좋아하는 껌을 선물로 수업 후 줬다. D는피아노를 치면서 멜로디와 화음 듣는 것을 좋아했다. 특히 그 아이는 러시아 노래의 리듬, 멜로디, 가사를 좋아했다. 러시아 노래를 부를 때면 D는 생기가 돌았고 목소리가 명랑해졌다. 느린 아이가 아니였다. 첫 딸의 사망을 현실로 인정하는 시간이 길었고 그 집의 장례식 분위기 시간이 길었다. 심지어 딸 얘기를 할 땐 가끔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형으로 말해 처음엔 그 딸이 사망했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을 정도다. 해서 D도 만나지도 못한 누나에 대한 슬픔이 있었다. 근데 D가 뭘 시작하려면 "나의 첫 딸은 그 때 그렇게 잘 했는데...왜 이 아인 다르지 ..." 이런식으로 D에게 영향이 갔다. 난
수업보다 그 문제를 자연스럽게 푸는게 순서라 생각했다. 내가 D를 가르칠 때면 꼭 모스크바에 있는 어떤 집에 들어간 듯 행복했다. 그 아이의 러시아 발음의 노래 실력이 나아지고 있었고 D도 자부심이 커지고 있었다. 개인지도 초반엔 어머닌 가끔 먼 곳 벽모퉁이에서 우셨는데 나중엔 먼 곳에서미소도 보내시고 같이 러시아 동요도 불렀다. D는 더 이상 예전처럼 내 앞에서방문틀 위에서 원숭이처럼 오르지도 않았다. 타잔처럼 소리치는 일도 도망가는 일도 없었다. 첫 딸과 비교해 항상 둘째 아이를 대했던 어머니의 태도도 달라지셨다. D는 첫 딸의 환생이 아니고 어머니의 통제가 잠시라도 없으면 무슨 일이 생길 수 있는 불안한 아이가 아니니 D에게 스스로의 신뢰감을 쌓도록 기회를 줘야한다고 말했다. D는 여자 아이가 아니라 그냥 평범한 남자아이일 뿐이라고 말씀드렸다.내 아이도 아들이라 내가 배운 것 중 하나다. D를 D자체로 인정하는 게 중요했다. 어느 날 D는 작은 외교관 행사에서 피아노 연주를 했다. 그 후 자기만의 자존감이 자라고 있었고 안정되고 차분해지고 있었고 숙제도 원만하고 꾸준히 했다. 노래할 때 차분히 자기감정을 표현하는 D의 섬세한 성격을 난 유심히 관찰하며 수업했다. 나에겐 작은 기쁨이었다.
젊었을 때 난 정말 대학 졸업 후 유학을 가고 싶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큰 집 오빠가 유학비 저렴한 러시아에서 마피아에게 살해되어 화장이 되어 한국에 돌아온 후 러시아 유학을 포기했다. 러시아는 나에게 그런 나라의 이미지였다. 근데 D가 내 인생에 잠깐 나타나 '러시아'란 내 무거웠던 추억의 단어에 아름다운 러시아의 노래로 장식을 해줬다. D가 나의 어떤 부분을 치유해줬다. 그 속엔 엄마를 찾으며 울고 있었던 19살의 나의 과거 시간도 함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D는 갑자기 학교에서 넘어져 손목을 다치는 사고가 났는데 병원에서 한 수술에 문제가 생겨 재수술을 하기 위해 급하게 러시아 모스크바로 어머니와 D다 급하게가야했다는 소식을 D의 아버지로부터 전해 들었다. 뒤에 남은 D의 아버지는 몇 달 뒤 임기를 채우고 러시아로 돌아가셨다.
내가 D의 레슨을 위해 D의 집에 갈 땐 D의 집에 항상 붉은 장미들이 있었다. 투명한 긴 화병에 매주 새로운 붉은 장미들이 있었다. 일 년 내내였다. 물어보니 D의 아버지가 매주 D의 어머니를 위해 한 다발씩 사 온다고 했다.
그 후 D가 모스크바의 초등학교로 잘 전학 갔다며 사진을 보내왔다.
이제 D는 13세쯤 되었을 거다. 지금 D의 부모는 러시아에 있는지 아님 외교관으로 다른 나라에서 우-러 전쟁을 보고 있는지 난 모른다. 사진을 보낸 얼마 후 연락이 끊어졌기 때문이다. 전쟁 반대자들로 러시아엔 2만 명가량이 감옥에 있다고 뉴스를 들었다.
우리가어린아이의 순수함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우린 놀이에 많은 시간을 쓸 수도 있을 것이다. 근데 우린 지금무기 사용에 시간과 돈을 너무 많이 쓰고 있다. 편 가르기도 하고 자기만의 잣대로 적군과 아군을 나누고 뒤에서 싸움 부추기는 사람들도 보인다. 이 틈을 이용해 장사하려는 장사치들도 기웃거린다. 그러는 동안 사람들이 양쪽에서 계속 쓰러지고 있다. 오징어 게임 같다.
내가 내 삶에 지치고 힘들었을 때우크라이나 친구는 우울했던 내 생일날에 꽃다발을 들고 갑자기 내 문앞에 나타났다. 다른 한 손엔 마늘파가 아닌 초콜릿 케이크를 들고 내 집 초인종을 눌렀다.
러시아 학부모는 작별 인사로 나에게 화병과 싱싱한 장미 한 다발을 선물했었다.
우크라이나 친구와 러시아 내 제자를 다시 만난다면 이 피 비린내 나는 전쟁에서 상처받은 그들 모두에게 이젠 내가 그들에게 붉은 장미의 꽃다발을 무릎을 꿇어 주고 싶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스마트 폰 관망자의 죄책감의 표현일 것이다.
사진 출처: juneflowers.com
***오늘의 노래 선물 ***
엠파시스 듀오가 부른 영화 시네마 천국에 중
시네마 천국
(아래 주소 손가락으로 누른 후 왼쪽 상단에 뜨는 YouTube 누르시면 음악 들을 수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