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장 정리 #5 회사 선배
5년차 대리.
육아휴직 후 복직 3개월차.
기존 업무에 대한 기억도 가물가물한데 새로운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부서로 이동하게 되었다.
복직 일주일 전 인사이동이 있다는 인사팀의 전화를 받고 얼마나 착잡했는지.. 잔뜩 부담감을 안고 출근했는데 키보드 위에 놓인 이 메시지를 보고 왈칵 눈물을 쏟을 뻔 했다. 휴직 전 인사정도만 나눴고 업무적으로도 마주친 적이 별로 없던 후배들이 준비해준 것이어서 더 놀랐다. 뒤이어 회의실에서 간단히 나를 환영해주는 자리가 있었고 필름카메라로 복직기념사진도 함께 촬영하는 영광을 안았다.
'프로젝트 중간에 개입하게 되어 도움이 되기는커녕 짐만 되는건 아닐까.'
'한 번도 뵌 적 없는 새로 오신 팀장님은 바쁜 업무 속에서 갑자기 새로 온다는 내가 귀찮지는 않을까.'
이런 불안한 내 심정을 다 헤아려서 준비해준건 아닐 테지만 적어도 내가 계륵같은 존재가 아니라 조금이라도 환영 받는 팀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는 점에서 큰 위안이 됐다.
이것만 봐도 얼마나 센스있는 친구들인지 알 수 있다. 거기다 일까지 너무나도 훌륭하게 잘 해내는 후배들이라니. 이때까지만 해도 마냥 좋았다.
그러나 점점 회사에 적응이 되고 역할을 맡을수록 묘한 느낌이 들었다.
후배들이 나보다 더 잘 알고 더 잘 한다.
나는 일을 아는 것도 아니고 모르는 것도 아니다.
큰 프로젝트가 한창 진행중이고 갑자기 중간에 들어왔으니 그동안의 과정이나 배경지식은 하나도 없고 일일이 설명해줄 사람은 당연히 없다. 후배들도 개별적으로 간단한 업무 인수인계와 대략 어떤일을 하고 있는지 정도는 브리핑해주며 세심하게 챙겨줬지만, 1년 넘게 준비되어온 이 프로젝트를 한 순간에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간 해왔던 업무와도 거리가 굉장히 멀어서 용어 자체도 생소했던지라 정말 말그대로 생기초부터 다시 시작이었다. 하지만 업무가 멈춰서 내가 오기만을 기다려주는 것도 아니었고, 나는 일 진행사항을 파악하며 기초지식까지 함께 익혀야만 했는데 그 속도가 벅차기도 했다.
"모르는건 신입 때 물어봐야 한다", "선배가 있을 때 편하게 물어봐라"
선배들이 해주던 이 말들이 다 사실이었다. 어정쩡한 대리 직책을 달고 보니 아래로 위로 눈치보느라 시간이 다 가는 기분이다. 팀 내 유일한 선배는 나와는 전혀 다른 프로젝트를 맡고 있었고, 이 일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후배에게 물어보려니 '뭐 어때?' 싶으면서도 그놈의 자존심 때문인지 질문을 가려서 하게 됐다. '이 선배는 이것도 모르나?' 하는 생각이 들면 어쩌나 싶고, 모르는게 많다고 느낄수록 든든한 선배와는 거리가 멀어지는 기분이 들까 걱정. 정말 쓸데없는 걱정. 의견을 하나 내도 말도 안되는 터무니없는 소리라고 생각하면 어떡하나.
그렇다고 뾰족한 수도 없으니 자꾸 작아지고 눈치만 보게 되는 것이다.
몸은 편한데 마음이 불편해
사실 편한 점도 많다.
내가 먼저 챙기려고 보면 이미 후배들이 해두었고, 내가 요청하지 않아도 먼저 하고 있었다. 내가 놓치거나 실수한 부분들을 바로 보고 알려주기도 하고. 정말 든든한 지원군이었다.
그러나 마음은 참 불편했다.
이 후배들과 함께 일하려면 내가 끊임없이 탐구하고 연구해야 했는데, 어떻게 보면 좋은 원동력일 수 있겠으나 워킹맘에게는 때로는 벅찼다. 이 친구들은 끊임없이 열심히 일하고, 나는 이걸 비슷하게라도 따라잡으려면 이 이상의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데 그러다보니 정신적으로 지치는 날도 더러 있었다.
회사퇴근하고 육아출근해야 하는 시간이 정해져있었기 때문에 야근할 수 있는 시간은 최대 한 시간. 그 이상이 필요하면 업무를 가지고 집으로 가야했고 아기를 목욕시키고 재우고 저녁먹고 나면 열시가 훌쩍 넘어 그때부터 일 시작이었다. 이 패턴이 반복되다보니 예민해져만 갔다. 이 예민함의 화살은 나를 가장 잘 이해해줄 수 있을 거라고 믿는 남편에게로 향했다. 도대체 남편이 무슨 잘못이야. 빨리빨리 흡수 못하고 있는 내 탓이지.
조금 오버하는 것일 수 있겠으나 1년 3개월 간의 공백기는 나에게 너무 크게 다가왔다. 거기다가 너무 일 잘하는 후배들과 함께 일하려니 든든하면서도 원망스러운 적도 있었다. 정신적으로 피폐해져가는 초반 적응기였다.
나는 과연 이런 후배였던 적이 있는가
우리팀 후배들이 또 하나 대단한 점은 분명 힘들텐데 힘든 것을 티를 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조금만 힘들어도 징징대고 툴툴대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나로써는 가장 신기했던 부분이다. 이게 정답이고 회사생활은 이렇게 해야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개인적으로는 스스로를 한 번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이 친구들은 왜 힘든데도 힘들다고 말하지 않을까'에 대해 고민을 해봤다. 개인의 성격일 수도 있겠으나, 내가 내린 결론은 동료들을 위해서인듯 했다. 직접적으로 물어보진 못했지만 그간의 대화의 내용이나 회사 분위기를 짐작해보면 그렇다. '왜 야근을 하냐', '업무가 그렇게 많냐' 등등 주변에서 걱정을 더러 해주는데, 우리가 그걸 인정하면 그게 부서 또는 부서장의 잘못으로 비춰질 수 있다는 점을 이해하는 것 아닌가 싶었다.
나는 과연... 저 연차 때 어땠는지... 생각해보니 조금 민망해진다. 티는 안 낸 다고 생각했지만 아주 그냥 얼굴에 티가 팍팍 났을 테지. "나 힘들어요" 라고 표정으로 광고를 하고 다녔던 것 같은데. 저런 이해심과 마음의 깊이는 어디서 나오는지 궁금하고 그렇게 주변을 살펴볼 수 있다는 게 부러웠다.
참 사람이 간사한게 원래 나는 그러지 말아야지 싶으면서도 어쩔 수 없는 '꼰대' 습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인턴이나 후배들이랑 있으면 저 친구는 왜 저럴까 싶었던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으니까. 심지어는 상대에게 티 안내려고 노력했지만 말투, 옷차림 등등도 거슬렸던 적도 있다.
그런데 정작 완벽에 가까운 후배들과 있다보니 그런 후배들이랑 일하는 게 몸과 마음이 오히려 편한 건가 싶은 아주 간사한 생각까지 들었다. 신경은 쓰이고 챙겨야 할 건 많겠지만 적어도 부담스럽거나 스스로 자괴감에 빠지지는 않으니까.
언젠가 후배들이 내 상사가 될 수도 있겠지
휴직을 앞두고는 내 동료들이 나보다 승진을 더 빨리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꼭 휴직 때문이 아니어도 고과평가, 업무능력 등등 기타 다른 요소들에 의해 그런 일이 충분히 있을 수 있지만, 휴직을 하려다보니 그 그림이 좀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그런 걸 모르고 휴직하는 건 아니니까 괜찮았다. 하나를 얻으려면 하나를 잃는 것 쯤은 감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요즘 들어서는 후배들이 내 상사가 될 수도 있겠다, 나보다 승진을 먼저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인데.. 이건 조금 느낌이 달랐다. 내가 잘해도 후배들이 더 잘하면 그럴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 내가 못하면 얼마나 더 박탈감이 더 심할까 하는 그런 생각들. 그럴 때 나는 어떤 태도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후배들에게 축하와 격려를 보내야겠지. 나는 또 상사답게 대우를 하고 아랫사람답게 업무에 협조를 해야할 텐데 얼마나 멋쩍고 민망할까 싶은 앞선 걱정.
이렇게 능력있는 후배들과 함께 일을 하니 고맙고 행복하고 영광스럽지만, 저 한켠에 단단하게 자리잡고 있는 불편한 마음. 이 마음이 내가 더 성장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될 수도 있겠으나.. 지나친 스트레스로 다가올 때도 있다. 우선은 잠깐의 공백기 탓에 자신감도 많이 결여되어 있고 걱정이 앞서있는 것 같다. 이럴 시간에 조금이라도 더 경험치, 능력치 쌓아야지 싶으면서도 빠릿빠릿하게 움직이는 후배들을 보면 또 조급해지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곧 있을지도 모를 사내 전체 인사를 앞두고 팀장님께 말씀드린 게 있었다. 내가 이 팀에 계속 있는다고 해도 다른 멤버들이 다른 팀으로 이동할 수도 있겠지만, 일단 이 팀으로 더 오래 함께 일하고 싶다고. 선배, 후배를 떠나서 배울 것들이 참 많은 후배들이고, 이 후배들과 한 팀이라는 것은 무한한 영광이다.
그래서 난 어떤 선배, 어떤 후배가 되고 싶은 걸까
어느 순간 회사에서 '육아' 이야기는안 꺼내게 됐다.
복직 초반에는 부서가 야근이 많은데 7시에는 퇴근해야 육아출근에 무리없이 성공할 수 있어서 퇴근시간을 예고하고 집에 업무를 가져가서 일을 하곤 했다. 그런데 매일 묵묵히 일하는 이 친구들을 보다보니, 공사 구분은 더욱 철저해야 하는데 왜 그랬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가 아프든 병원에 가야하든 결국 내 개인적인 문제고, 업무를 같이 하는 동료들이 알아야 할 건 아닌데. 그러다보니 사사로운 이야기도 나 워킹맘이라고 유난 떠는 것 같고 대접받고 이해받길 원하는 것처럼 비춰질 수 있을 것 같아 아이 이야기는 아예 언급하지 않는 쪽을 택했다. 무엇이 됐든 핑계나 책임회피에 불과할 것 같아서.
이렇게까지 갑갑하게 할 필요가 있나 싶을 수 있겠지만, 어차피 미혼이거나 아기가 없는 후배들이 이해할 수 있는 부분도 아니고.. 나도 굳이 이해시키려 열심히 설명할 필요도 없고. 그냥 일은 일대로 잘 해나가면 되는 것이다.
'복직해서 잘 모른다', '육아 때문에 정신이 없다' 이런 건 정말 불필요한 이야기들. 적응도 첫 한 달이면 충분한데 계속 이럴거면 그냥 퇴직하고 육아에 전념해야지 싶은 생각이 들 수도 있지 않을까. 다들 저마다 개인 사정이 있기 마련인 것을. 결혼 안 하고 애가 없다고 해서 사적인 일까지 없을 리가 없는데. 출산, 육아가 벼슬도 아니고. 회사에서 '복직', '육아' 이런 것들에 대한 언급은 핑계 또는 책임회피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러다 조금 방향성이 뚜렷해진건 최근 연말 고과평가 시즌을 맞이하면서부터다. 고과평가의 끝은 팀장과의 개인면담이다. 매사에 꼼꼼한 우리 팀장은 한 사람 당 한 시간 이상 이 면담에 투자해주었다. 고작 4개월 함께 일한 것이 전부지만, 팀장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는 잘 몰라도 어떤 직원인지, 어떤 마음가짐으로 근무를 하고 있는지 훤히 다 꿰뚫어보고 있었다. 자신감이 많이 떨어져있는 점, 소심한 점, 생각이 너무 많은 점 등등. 그리고 내가 생각하지도 않은 내 장점들을 알려주신 것이 가장 놀라웠다. 이게 장점이었나? 그때 내 업무처리가 그랬었나? 꽤 디테일하게 자존감에 숨을 불어넣어주시던 팀장님.
이때 확신이 들었다. 어차피 일은 다들 너무나도 알아서 훌륭하게 잘해내고 있잖아. 교과서같은 이야기처럼 들릴지라도 엄한 데 오지랖부리지 말고 나는 나대로 일을 잘 하자. 승진이나 고과평가 따위는 과정에 따른 결과일 뿐 내 능력 밖인 걸 미리부터 걱정해서 무얼하나. 내 페이스대로 내 위치에서 열심히 하는 것, 그래도 최소한 이 부분만큼은 나의 노력만으로 가능한 범주인 듯 하다. 이것을 일차적인 목표로 설정해본다. 후배들 위에서 뭔가를 해주려고 하지도 말고, 후배들 아래에서 눈치보지도 말자. 의기소침해지지 말고 일단 내 주어진 일만 하자. 그러다보면 뭐라도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