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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입장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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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라 Dec 15. 2021

맵찔이의 무서운 착각, 먹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입장 정리 #7 맵찔이, 맵린이





대구에 아주 유명한 매운 음식이 있다. '빨간 어묵'의 원조라고 알고 있는데, 붉은 집 모양을 연상하여 붙인 가게 이름의 어묵이다. 사업 실패 후 먹을 것이 없어 어묵을 맵게 끓여 먹다가 탄생하게 된 메뉴라고 가게 사장님으로부터 들었다. 이 갑판식의 작은 가게는 점점 인기가 많아지면서 홀이 있는 가게로 확장하고, 규모가 커지면서 경상도 지역 프랜차이즈로 뻗어나갔다.


이 가게만 지나가면 알싸한 캡사이신 향이 코를 찌르는 순간 침이 과다하게 분비되어 혀 아래에 고이곤 했는데. 아... 이걸 쓰면서 상상했더니 또 침 한 번 꼴깍. 보기만해도 시뻘개서 맵찔이인 나는 감히 또 도전해볼 자신이 없다면서도 땀흘리며 맛있게 먹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귀신에 홀리듯 가게로 들어가곤 했었다. 왠지 나도 잘 먹을 수 있을 것만 같는 아주 위험한 착각에 빠져들면서.


동창들끼리 추억의 음식 이야기를 하다 보면 이 메뉴가 절대 빠지지 않는다. 언니는 서울에 살면서도 택배로 박스째 대량주문을 하기도 한다. 그럼 꼭 나에게 나눠주는데 어묵을 워낙 좋아하는 나는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다 먹으려고 물에 씻어먹기도 하고 급기야는 소스를 다 털고 난 후 끓여먹는다. 그럴거면 그냥 일반 오뎅을 사먹으라고, 왜 돈 더 주고 이걸 사먹냐고... 안타까운 표정으로 이야기들을 한다. 이 소량의 소스라도 '향'이가미되고 안되고가 얼마나 다른데! 사실 소스를 다 털어먹으면서도 맵다고 눈물 콧물 다 뺀다. 한 개도 다 먹기 전에 두손두발 다 들고야 마는 것이다. 어묵 앞에 내가 패배하는 순간이다. 아무리 치즈를 얹고 쿨피스가 합세해도 더이상 못 먹겠어.


고향이 대구라고 하면 으레 매운 것을 잘 먹는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경상도 지방 음식은 더운 지역 특성상 짜고 매운 자극적인 음식으로 만들어졌다. 음식의 염도는 기본적으로 날씨 온도와 관련이 있는데, 염도가 높아야 음식이 오래 버틸 수 있기 때문이다. 대구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모두가 매운 음식을 잘 먹을 수는 없겠지만, 그런 환경에 오래 노출되어 살다보면 자극적인 걸 잘 먹을 법도 하겠지. 하지만 나는 거의 15년 이상을 단련했지만 초딩 입맛을 일관되게 유지하고 있다. 나는 매운 맛의 표준이 되는 신라면조차 먹는 동안 입술이 부르튼다. 그래서 아무리 매콤한 게 당겨도 메뉴판을 보고는'신라면 맵기' 바로 아랫 단계를 선택하는 경향이 있다.







대구 동성로 '빨간지붕' 어묵





매운 음식을 먹으면 스트레스가 풀린다고?



매운걸 좋아하는 사람들이 너무 신기해서 도대체 왜 매운 음식이 좋냐고 물었더니, 아니 글쎄 매운걸 먹으면 스트레스가 풀린단다. 응? 매운걸 먹으면 스트레스가 쌓이는게 아니고?


실제로 우리의 미각에 '매운 맛'은 없다고 배운 기억이 있다. 미각은 단 맛, 짠 맛, 쓴 맛, 신 맛 등 총 4가지로, 매운 맛과 떫은 맛은 미각이 아니라 피부에서 느껴지는 통각에 해당된다. 즉, 아픔을 느끼는 고통의 영역이라는 뜻이다. 매운 걸 먹는 사람들은 이 통각이 무딘 것이다. 실제로 주변에 물어보니 매운 걸 잘 먹는다는게 매운 맛을 덜 느낀다는 건 줄 알았는데, 본인도 맵긴 맵다고. 그들은 매운 맛을 그저 잘 견뎌내고 잘 즐길 줄 아는 것일까?


매운 걸 못 먹는 나지만 매운 맛에도 맛있는 맛, 맛없는 맛이 있다는 것 정도는 나도 안다. 무조건 맵기만 한 음식이 있는가 하면 매운 건 알겠는데 한 번 더 젓가락이 가는 음식이 있다. 하루는 새로운 레시피로 떠오르던 '순두부 열라면'이 너무 먹고싶어서 순두부, 달걀, 오징어 등등 이것저것 다 들어갔으니 그다지 안 맵겠지 라는 막연한 생각에 끓였는데 웬걸.. 세 입 만에 콧물을 훌쩍이기 시작했다. 다음 차례엔 너무 매워서 반의 반도 못 먹으니 소스를 조금 덜어내어 먹어보기로 한다. 하.. 근데 또 그 맛이 아니다. 밍밍해.







나도 매운거 잘 먹고 싶어


매운 음식을 잘 먹는 사람을 보면 경외심을 느낀다. 1단계에서 9단계까지 맵기가 있으면, 나는 0단계는 없냐고 묻는데 옆에서 9단계를 주문하는 사람.


매운 음식을 잘 먹는 사람들이 부러운 이유는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방법이 간단하고 명쾌하다는 것. "아 오늘 스트레스 받네. 불닭볶음면 하나 때려야겠다." 하고 먹고 나면 속이 후련하다고 한다. 어디 멀리 떠나지 않아도, 큰 돈을 들이지 않아도 단 10분 만에 가벼운 스트레스 정도는 날려버린다. 매운 맛은 핫하지만 즐기는 사람은 쿨한데?


취미가 일이 되어 스트레스 푸는 법을 잃어버린 나는 새로운 탈출구 찾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던 적이 있었다. 그 중 하나가 매운 음식 즐기기에 도전하는 것이었는데, 최단 기간 만에 포기했다. 여파가 너무 심했다. 속쓰림은 다음 날까지 이어졌고 위아래로 불난 데에 응급처치를 하느라 아이스커피만 계속 부어댔다. 오히려 역효과가 아닐까 싶었다. 끝내 버텨내 즐거움을 얻더라도 스트레스를 풀면 뭐하나, 몸이 혹사되는데. 정신적 건강을 얻을지언정 육체적 건강이 한방에 훅 갈 것이라는 직감이 들었다.


아, 이것마저 선천적으로 타고난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구나!







매운 것도 자꾸 먹다보면 는다고?


스트레스도 쌓이다보면 면역이 생겨서 수용하는 그릇이 커지게 된다. 그런데 그렇다고 괜찮은 건 아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 탈이 나고 건강에 적신호가 떠서야 '아, 내가 스트레스를 그동안 많이 받았구나' 한다.


주변에 물어보면 대부분 처음부터 매운 음식을 이렇게 잘 먹은 건 아니라고 한다. 이것도 먹다보니 늘고, 먹을수록 한계치를 경신하는 느낌이라고. 반대로 자주 먹지 않으면 또 예전같지 않다고 하는데. 단순히 감당할 수 있는 맵기 단계만 올랐을 뿐, 그것이 당신의 몸에 맞는다고 볼 수는 없지 않은가. 몸뚱아리는 원하지 않는데 정신이 자꾸 자극적인 것을 들이붓고만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아무튼 이런저런 핑계로 매운 걸 피하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난 영원히 맵찔이로 남을 모양이다. 다음 세상엔 꼭 매운 걸로 속 시원하게 스트레스 푸는 핫한 쿨녀로 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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