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케이주 May 03. 2021

소싯적 보안사 직원 관련한 기억들<5>

그 사학재단 관계자에게 해야 한다는 '인사' 금액은 얼마였을까

1980년 군사정권 출범 후 사실상 최고의 권력기관으로 부상한 국군보안사령부의 덕을 톡톡히 보나 싶었다. 대전의 한 사립 여고 교사인 집사람의 근무지를 서울로 옮겨주겠다니 이렇게 고마울 수가. 결혼과 함께 시작된 국방부 정훈국 소속 공군 중위의 주말부부 생활이 단시간에 청산될 줄로만 알았다. 당시 사회 전반적 분위기로는 보안사의 입김이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란 없었다. 중앙정보부의 명맥을 이은 국가안전기획부조차도 한 끗발 밀릴 정도였으니까. 결혼과 거의 동시에 국방부 파견에서 전속으로 전환된 1981년 11월은 전해의 5·18 광주 민주화운동 진압에 개입한, 신군부의 실세 박준병 중장(육사 12기)이 보안사령관이었을 시기였다.

그런데 문제는 사학재단 고위 관계자에게 ‘인사’를 해야 한다는 보안사 직원의 설명이었다. 구체적인 액수를 되물어도 의미심장한 옅은 미소만 띤 때 딴청만 부리는 그 직원에게 “여하튼 잘 알겠다”며 일단 국방부 본부 뒤편 부속 건물의 100보안대를 나왔다. 문화홍보과 사무실로 돌아와 그 직원을 소개한 과장에게 간단한 면담 결과보고를 한 것으로 기억된다. 당시 내 전 재산은 결혼 직전 부모님이 급히 마련해준 강동구 암사동 11평 시영아파트의 전세금 350만원이 전부였다. 공군 중위 1호봉의 월급은 13만원쯤. 나이 26세에 내 가정을 하루 속히 꾸리겠다고 고집하면서 결혼 이후에는 단 한 푼의 도움도 받지 않겠다고 전 가족들에게 공언했었다.

1981년 11월 국방부 정훈국의 해군 소령과 한미친선활동 인수인계 작업을 할 당시 미군들과 기념촬영. 한가운데 공군 정복 차림이 나.

예외적으로 단 하나. 당시 다니던 Y대 행정대학원의 학비만 5학기 전 과정 마칠 때까지 부모님 도움을 받기로 한 터였다. 결국 ‘인사 자금’을 마련할 길이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고, 집사람의 서울 이직은 더 이상 모색하지 않았다. 담임을 맡고 있던 집사람이 겨울방학 후 새 학기가 시작되기 직전인 이듬해 2월 사표를 내는 것으로 호기롭게(?) 정리됐다. 따라서 그 보안사 직원을 다시 만날 이유가 없어졌는데, 돌이켜 보면 지금도 궁금하긴 하다. 필요하다는 그 ‘인사’ 금액은 과연 얼마였을까. 그 ‘인사’라는 것이 혹 본인이 챙길 커미션은 아니었을까. 만약 집사람이 보안사 직원 덕택에 서울서 교편을 계속 잡았다면 내 삶은 어떻게 변했을까. 제5공화국 정권에 신세를 졌다는, 떳떳하지 못한 부채의식이 내게 늘 남아 있지는 않았을까.

대전의 한 사립여고 담임을 맡고 있던 집사람. 결혼 후 새 학기가 시작되기 전 사표를 내고 '경단녀'가 됐다.




















매거진의 이전글 소싯적 보안사 직원 관련한 기억들<4>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