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사람 재직 중인 학교를 서울로 옮기는 데 '인사'가 필요하다고
대통령 7년 단임제 개헌에 따른 제5공화국이 출범한 해인 1981년 11월 말쯤이었다. 아니 세상에, 이렇게 고마울 데가 있나 싶었다. 결혼하자마자 주말부부 처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말단 위관급의 고민을 해결해주겠다니. 보안사의 국방부 정훈국 담당자가 관내 정보를 챙기다 파견에서 ‘현 위치 전속’으로 막 전환된 공군 중위의 신변문제도 파악한 듯했다. 당시 집사람은 대전의 사립여고 교사였는데 국공립이면 모를까 사립에서 사립으로의 지역 이동은 쉽지 않았다. 이런 난제를 “우리 직원이 해결해줄 수 있다”고 정훈국 담당 보안사 상사가 내 직속상관인 문화홍보과장에게 호언한 것이었다.
처음 과장이 날 불러 관련 내용을 귀띔했을 때는 순간 등골이 좀 서늘한 느낌을 받기도 했다. 보안사 담당자가 관내 인물들의 사생활 정보에도 감시의 눈길을 소홀히 하지 않고 있다는 방증 아닌가. 어쨌거나 도와주겠다는데 마다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어느 날 오후 과장이 가르쳐준 대로 국방부 본부 뒤편의 부속건물에 자리한 100보안대 사무실을 찾았다. 정훈국 담당자가 소개한 ‘해결사’ 직원을 만나기 위해서였는데, 이름이야 까맣게 잊었지만 계급은 중사였던 것으로 어렴풋이 기억된다. 피차 만남의 이유를 잘 알고 있는 터인지라 짤막한 인사 외에 본론에 돌입해서도 긴 말은 오가지 않았다.
집사람의 근무지를 서울로 옮기는 건 별 어려운 문제가 아니라는 게 그의 장담이었다. 본인의 지인 말 한마디면 되는데, 다만 ‘인사’를 좀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인사의 의미를 모를 정도로 숙맥은 아니었기에 어느 정도가 필요한지 되물었다. 그는 옅은 미소만 살짝 띤 채 시선을 돌려 짐짓 책상 위의 서류들을 주섬주섬 정리하는 척했다. “세상 경험이 부족해 정말 몰라서 그러니 얼마나 해야 하는지 가르쳐달라”고 다시 한 번 채근했다. 하지만 그는 알 듯 말 듯한 미소만 머금고 의자에서 일어나 책상 물건들만 이것저것 매만지며 답변은 하지 않았다. “그것도 몰라?” 아니면 “당신이 알아봐야 하는 거 아냐?”라는 의미인 것도 같았다. --<5>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