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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처럼 May 16. 2024

<7> 자유로운 지성이 두려움을
이긴다

<종교가 뭐길래>

-더 이상 하늘의 후원자를 찾지 마라

-지성과 영성의 화해를 도모하라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고 두려워하지 말자. 세상의 공포감에 비굴하게 굴복하지 말고 지성으로 세상을 정복하자. 신에 대한 모든 관념은 동양의 고대 전제주의에서 나왔다. 자유인들에겐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망치를 들고 20세기 문을 연 독일 철학자 니체는 “신은 죽었다”라고 선언했다. “모든 신은 죽었다. 이제 우리는 초인이 등장하기를 바란다. 이것이 언젠가 찾아올 위대한 정오에 우리의 마지막 의지가 되기를!” 그의 대표작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나오는 문장이다.


카를 마르크스가 종교를 ‘인민의 아편’이라 규정하고, 찰스 다윈이 ‘진화론’을 발표한 데 이어 니체가 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나서자 유럽 사회는 큰 충격에 빠졌다. 2000년 동안 서구인의 삶과 사상을 지배해 온 신에 의한 인간 창조론을 대놓고 부정하다니….


니체의 한 세대 후배 철학자 러셀도 유사한 목소리를 냈다. 모든 종교는 거짓되고 해롭다고 선언했다. 종교를 질병이며 괴물이라고까지 규정했다. 신이 세상을 다스린다는 생각은 더 이상 진실되지도 유용하지도 않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기독교계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쳐 이단자로 몰린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100년의 세월이 흘렀다. 종교에 대한 21세기 현대인들의 생각은 어떤가?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종교 무관심층이 점차 늘고 있지만 기독교, 불교, 이슬람교, 힌두교 등 고등종교가 가까운 장래에 사라질 기미는 전혀 없다. 전 세계 인구의 약 80%는 여전히 종교를 갖고 있다. 


러셀은 왜 종교에 부정적이었을까? 그가 살았던 시절에는 영국인 거의 대부분이 성공회나 가톨릭 등 기독교 신자였다. 하지만 그에게는 좀처럼 믿음이 생기지 않았다. 유아기 때 부모를 잃고 신앙 좋은 조부모 손에 자라면서 열심히 교회를 다녔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신의 존재에 회의를 느끼게 된다. 세상만사 논리적, 과학적으로 따지는 철학 마인드가 일찍 스며들었기 때문이었을까?


대학 진학 직전인 18세 때,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의 ‘자서전’을 읽고는 결국 무신론자가 되고 말았다. 자서전을 보면, 밀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이런 가르침을 줬다고 한다. “누가 나를 만들었는가?”라는 의문에는 해답이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렇게 묻는 즉시 “그럼 하느님은 누가 만들었는가?”라는 보다 깊은 의문이 제기되기 때문이란다. 밀은 러셀이 불과 한 살 때 죽었지만 그의 대부(代父)였기에 그 충격이 매우 컸으리라 짐작된다.


이는 중세 이래 ‘제1원인론’이라 불리던 신의 존재 증명이 신의 존재를 합리적으로 입증하지 못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러셀은 저서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에서 이런 논리를 전개한다. “모든 것에 원인이 있다고 한다면 하느님에게도 원인이 있어야 한다. 반대로 어떤 것이 원인 없이 존재할 수 있다면 이 세상도 하느님처럼 원인 없이 존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이제 제1원인론은 아무 타당성도 없다.”


성인이 된 러셀은 단 한 번도 종교를 가진 적이 없다. 단순히 가지지 않는데 그치지 않고 종교, 특히 기독교의 폐해를 고발했다. 각종 칼럼과 강연을 통해 진실성과 유용성 차원에서 기독교를 끊임없이 비판했다. 자유주의자, 합리주의자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한 셈이다.


그의 비판은 기독교가 세상에 많은 해악을 끼쳤다는 것이 핵심이다. 기독교가 사회 도덕률의 원천임에 분명하지만 실제로는 자비와 정반대의 길을 걸어왔다고 강조한다. 중세 교회의 타락과 잔학무도한 행위, 특히 이단자와 마녀에 대한 화형은 씻을 수 없는 과오라고 지적한다. 십자군 전쟁과 신구교 종교전쟁도 하느님의 가르침에 위배된다고 규정했다.


그는 기독교가 합리성 결여로 인해 과학 발전과 현대 교육에 걸림돌이 되고 있으며, 전쟁의 근본 원인을 제거하려는 노력을 방해한다고 했다. 이혼과 산아제한을 반대하는 가톨릭 교리는 반 사회적, 반 인권적이라고 규정하기도 했다. 지나친 엄숙주의로 인해 ‘사랑의 기교’에 대한 지식을 모조리 배격함으로써 성생활의 행복을 막는 것도 해악이라고 생각했다. 


기독교 역사를 되짚어보면 이런 주장은 상당 부분 맞는 말이다. 중세 기독교 폐해에 관한 한 이 시대 성직자들도 대부분 수긍하는 내용들이다. 러셀이 이런 말을 내뱉은 100년 전에도 나쁜 잔재가 일부 남아있었다는 점에서 그의 비판은 합리성을 결여했다고 보기 어렵다. 표현이 지나칠 정도로 과격한 나머지 신앙인들에게 반감을 산 것은 어쩔 수 없다.


러셀은 공포나 두려움이 종교적 독단의 기반이라고 규정했다. 자연에 대한 공포, 신비한 것에 대한 두려움, 죽음에 대한 공포, 패배에 대한 불안 등이 종교를 부른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지성으로 공포나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서두에 소개한 문장이 그것이다.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에 나오는 표현이다.


그는 행복을 바란다면 종교에 의지할 것이 아니라 나날이 발전하고 있는 과학과 지성을 믿는 것이 좋다고 했다. “이제는 더 이상 가상의 후원자를 찾아 두리번거리지 말자. 하늘에 있는 후원자를 만들어내지 말고 이곳 땅에서 우리 자신의 힘에 의지하자.” “오래전 무식한 사람들이 내뱉은 말들로 자유로운 지성에 족쇄를 채우는 짓은 전혀 필요하지 않다. 이 순간 두려움 없는 직시와 자유로운 지성이 절실히 요구된다.”


종교에 대한 러셀의 이런 입장은 철학자로서 어쩌면 자연스러운 태도인지 모른다. 종교는 믿음을 바탕으로 하지만 철학은 회의와 파괴, 반성을 기둥으로 삼는다. 둘은 기본적으로 불편한 관계일 수밖에 없다. 경험주의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이 “아는 것이 힘이다”라고 말했을 때 그것은 다분히 혁명적이고 파괴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모든 사림들이 신의 은총이 인간의 힘을 결정짓는다고 말할 때 베이컨은 홀로 지식이 그것을 결정짓는다고 했다.


이런 사고 체계를 가진 사람은 당연히 신의 존재나 종교를 인정하기 어렵다. 사실 철학자는 어떠한 믿음도 거부하는 경향이 있다. 지적 증명이 믿음에 앞선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러셀이 신을 믿지 않은 것도 자기 능력으로 신의 존재를 확인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평생 종교와 거리를 두고 살았지만 100% 무신론자라고 보기 어려운 측면도 있다. 신에 대한 그의 정확한 인식은 신이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철학에서 ‘불가지론(不可知論)’이라고 부르는 입장이 그것이다. 신의 존재를 인정하고 믿으려면 그 존재에 대한 명백하고도 합리적인 증거가 필요하지만 자신이 그 증거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반대로 그에게는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증거 또한 찾을 수 없다는 입장이다.


러셀은 기독교라는 종교에는 개인적 믿음, 신학, 교회 등 세 가지 영역이 있다고 보고 이 가운데 개인적 믿음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세 가지 가운데 역사적으로 가장 많은 해악을 끼친 것은 교회라고 했다. 제도로서의 교회에 지나치게 권위를 부여한 나머지 이성적, 합리적 근거도 없이 많은 사람들을 박해했다고 봤다. 


따라서 러셀은 종교적 구원을 받으려면 개인적 믿음에 비중을 두고 살아야 한다고 했다. 자기 비움, 자기 포기를 통해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우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생각이다. 자기 내면에 대한 성찰과 이웃에 대한 사랑, 진리 추구, 세상에 대한 연민으로 행복을 구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신에 대해서는 끝내 그 존재를 확인하지 못했다. 


인간 사회에서 종교는 불가사의한 측면이 있다. 20세기 들어 과학이 급속도로 발전하면 크게 위축될 것으로 예상됐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많은 과학자, 철학자들이 종교 무용론을 주장하지만 지금도 지성을 넘어 영성을 찾으려는 사람들이 줄을 잇고 있다. 그 이유는 뭘까?


러셀 시기 종교는 유사 이래 가장 큰 위기를 맞았다. 특히 다윈의 진화론이 한껏 힘을 받으면서 신에 의한 인간 창조를 믿는 기독교가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았지만 신자가 오히려 늘어나는 기현상을 보였다. 기독교가 역사적 반성과 함께 뼈를 깎는 자기 혁신으로 새로운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라고 본다.


종교가 지향하는 세상은 언제나 사랑이다. 모든 종교의 황금률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역시 사랑이라 할 수 있다. 사랑이란 배려와 포용 아닐까? 역사적으로 비판받은 종교의 폐해는 사랑을 지키지 못한 데서 비롯됐다. 종교를 가진 사람이 남에 대한 배려와 포용으로 사랑을 실천하면 십중팔구 구원받을 수 있을 것이다. 


언젠가 프란치스코 교황은 무신론자 언론인이 “신은 자신을 믿지 않은 사람들을 용서할까요?”라고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신의 자비는 한계가 없다. 신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양심에 따라 행동하면 된다.” 


교황의 이 말은 종교인과 비종교인, 그리고 종교 간 화합을 의미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종교와 관련한 모든 대립과 갈등은 사랑과 거리가 멀기에 구원을 기대하기 어렵다. 예나 지금이나 자기 종교가 가장 훌륭하다고 우기는 것은 난센스다. 바탕에 증오가 깔린 언행이다. 종교가 구현하는 진리는 결국 하나다. 각 종교가 그 진리를 찾아가는 길이 조금씩 다를 뿐이다.


이런 측면에서 종교는 과학이나 이성과도 얼마든지 공존할 수 있다. 과학은 과학이고, 종교는 종교라고 생각하면 그만이다. 서로 이해하고 존중하면 어떤 갈등도 극복할 수 있지 않을까? 


러셀은 기독교를 줄기차게 비판하면서도 내심 초월적인 존재를 찾으려고 애썼다. 자신이 무신론자라기보다 불가지론자에 가깝다는 입장을 고수한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지성과 영성의 화해가 그의 속마음이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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