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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처럼 Jul 04. 2024

<19> 권태에 대한 두려움은 죄악의 근원이다

<권태>

-아무리 훌륭한 소설에도 지루한 대목이 있다

-단조로운 삶을 견디는 능력을 길러라 



“자극이 너무 적으면 병적인 갈망을 자아내고, 너무 많으면 심신을 황폐하게 한다. 그러므로 권태를 어느 정도 견딜 수 있는 힘은 행복한 삶을 위해 필수다.”



가수 노사연이 언젠가 TV 프로에 출연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결혼한 지 2년쯤 되었을 때 첫 권태기가 왔는데 오물거리며 밥 먹는 남편의 입이 꼴 보기 싫더라. 5년쯤 뒤 두 번째 권태기 때는 잠자는 남편 머리 위로 벽에 걸어둔 액자가 떨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결혼하고 10년쯤 지나서야 그저 다 봐주게 되더라.”


우스개 소리 잘하는 연예인의 다소 과장된 이야기겠지만 권태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표현한 말이다. 권태는 누구한테나 흔하게 찾아올 수 있는 나쁜 감정이다. 일상의 모든 일이 시들해지면서 생기는 게으름이나 지겨움, 싫증을 말한다. 매사에 흥미가 없고 의욕을 잃게 된다는 점에서 고통스럽다. 또 미래에 대한 목표가 뚜렷하지 않고 열정이 사라지기 때문에 우울하기 십상이다. 심하면 무기력증이나 허무주의를 몰고 온다. 노사연이 말한 것처럼 배우자나 직장 동료, 친구 등 가까운 사람들이 갑자기 싫어진다.


‘군주론’의 저자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권태가 무척 힘들었던 모양이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가난도 걱정도 병도 아니다. 그것은 바로 삶의 권태이다.” 불세출의 화가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권태보다 차라리 죽음을 달라”라고 했다.


삶에서 권태를 한 번도 느껴보지 않은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열심히 살면 열심히 살아서 권태가 오고 대충 살면 대충 살아서 권태가 온다.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 10년째 직장 생활에 몰두하는 가장, 가사와 육아에 여념이 없는 주부, 장기근속 중인 공무원에게 어느 날 갑자기 권태가 찾아올 수 있다. 사춘기나 갱년기가 겹치면 증상이 심하다. 


러셀은 이런 권태가 행복과 불행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큰 관심을 가졌다. 그의 대처법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지나친 욕망이나 자극을 배제하고 적정한 수준의 권태를 받아들여 단순하고 조용한 삶을 사는 것이 행복의 지름길이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불행해질 가능성이 크다고 분석한다. 서두에 소개한 문장은 그의 저서 ‘행복의 정복’에 나오는 말이다.


러셀은 과거에 비해 권태의 정도는 덜하지만 그것에 대한 두려움은 훨씬 더 깊다고 진단했다. 그는 권태의 반대는 쾌락이 아니라 자극이라고 규정하고, 권태에서 벗어나려고 지나친 자극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많은 문제가 발생한다고 보았다. 전쟁이나 학살, 박해는 모두 부분적으로는 권태에서 도망치기 위한 방편이라고 진단한다. “인류가 저지르는 죄악의 절반 이상은 권태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된 것이다.” 


개인적 삶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란다. 지나치게 많은 자극은 건강을 해칠 뿐 아니라 모든 종류의 쾌감에 대한 감각을 무디게 만든다는 게 러셀의 생각이다. 그것은 근본적인 만족감을 표면적인 쾌감으로, 지혜를 얄팍한 재치로, 아름다움을 생경한 놀라움으로 바꾸어버린단다. 실제로 모든 자극은 밑 빠진 독이나 마찬가지다. 누구한테나 환희와 감격은 쾌락의 필수 요소이기 때문에 더 큰 환희와 감격을 위해 더 강력한 자극을 찾을 수밖에 없다.

 

러셀은 권태가 전적으로 나쁜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적정 수준의 권태는 지나치게 많은 자극보다 나쁠 것이 없다고 했다. 권태 차제가 유익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어느 정도 참아내는 능력을 갖추는 것은 행복을 위해 더없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이 문제는 특이 어린이나 젊은이들에게 중요하다고 했다.


“어린이나 젊은이가 진지하고도 건설적인 목적을 지니고 있고, 권태가 반드시 견뎌내야 하는 것임을 이해하게 된다면 그 양이 아무리 많아도 자진해서 참아낼 것이다.”


러셀은 특히 어린이에게는 순간적인 쾌락에 대한 접근을 차단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일시적이면서도 자극적인 쾌락의 경우 그것이 끝나는 순간 답답함과 불만, 알 수 없는 허기를 느끼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그 대신 단조로운 삶을 견디는 능력을 길러주라고 조언한다. 그런 삶에 지겨움을 느끼지 않을 줄 알아야 한다.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도 인생에서 욕망이 충족되어 공허감이 생기는 권태를 불가피한 감정이라고 보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삶에 긍정적인 마인드를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그는 권태가 반드시 부정적인 감정이 아니며, 목표한 바를 성공적으로 이끄는데 어느 정도 필요하다고 보았다. “권태는 얼어붙은 삶의 의지를 녹여주는 봄바람이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는 “삶은 욕망(고통)과 권태 사이를 오가는 시계추와 같다”라고 했다. 그의 생각을 요약하면 대략 이렇다. 모든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욕망을 갖고 있다. 욕망이 있는 한 그것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고통이 생긴다. 그런데 욕망을 이루고 나면 행복을 느끼지만 잠깐일 뿐이다. 또 다른 욕망을 추구하지 않는 한 곧바로 권태에 빠진다.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권태는 젊은 부부들이 흔하게 경험한다. 사랑에 빠져 결혼을 하지만 그 쾌감은 오래가지 않는다. 결혼 생활에서 매너리즘은 당연한 것임에도 그것을 지혜롭게 극복하지 못하면 결국 파경을 맞게 된다. 명문대학 입시에 성공한 대학생이나 대기업 취업 목표를 달성한 젊은 직장인도 마찬가지다. 누구에게나 목표 달성에 따른 성공의 희열은 잠깐일 뿐이다. 그러므로 곧이어 밀려오는 공허한 느낌의 권태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스스로 활력을 유지해야 한다.


러셀은 말한다. “아무리 훌륭한 소설에도 지루한 대목이 있다.” 첫 페이지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시종일관 재치 넘치는 소설은 훌륭한 작품이 아니란다. 역사상 위대한 사람들의 생애 역시 몇몇 위대한 시기를 빼놓고는 그다지 흥미롭지 않다고 했다.

 

그렇다. 소크라테스의 경우 재판에 임할 때나 독약을 마실 때는 대범하고 멋진 언행으로 주변의 찬사를 받았다. 하지만 평소에는 매일 일정한 시간에 아테네 광장에 나가 청년들과 토론을 즐기고 집에 들어와서는 부인과 함께 한가한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노벨 평화상을 받은 슈바이처 박사나 테레사 수녀도 긴 시간 똑같은 모습으로 환자를 치료하거나 빈민들을 돌보았을 것이다. 그들에게 권태가 없었을 리 없다. 하지만 스스로 선택한 일이기에 불행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결국 권태는 인생에서 불가피한 것임을 인식하고 수용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호기심이나 떨림이 항상 가까이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익숙하거나 당연한 것을 소중히 여길 줄 알아야겠다. 감사하는 마음이 바로 그것 아닐까?


오늘 아침 건강한 모습으로 깨어나 또 다른 하루를 시작하는 것에 감사할 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직장인이라면 매일 출근할 곳이 있다는 사실에 고마워할 줄 알아야 한다. 결혼한 사람이라면 배우자가 건재하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할 수 있어야겠다. 


익숙하거나 당연한 일에 싫증이 나고 견디기 어려운 나머지 새로운 도전에 나서는 것은 얼마든지 좋다. 추가적인 욕망으로 활력을 얻는다면 더 큰 행복을 만날 수 있다. 개인의 발전과 성장은 대부분 이렇게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뚜렷한 목표도 없이 당장 권태에서 탈출하는데 급급한 나머지 자극을 찾아 나서는 것은 어리석고도 위험한 일이다. 그렇게 해서 순간적인 쾌락을 얻어봤자 곧바로 피로감과 자기 혐오감에 직면할 것이다. 이런 식의 권태 탈출은 대부분 사회적 일탈의 형태로 나타난다. 권태를 두려워하는 사람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진정 행복을 원한다면 권태를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일정 수준 받아들여 즐길 줄 알아야 한다. 살아 숨 쉬는 사람이라면 누구도 완전히 벗어나기 어려운 것이 권태라면 그것을 제거하기보다 인정하고 관리하는 데 집중해야겠다. 그것은 바로 조용한 일상에 만족할 줄 아는 삶이라 할 수 있다. 러셀은 이런 말을 남겼다.


“행복한 인생이란 대부분 조용한 삶이다. 진정한 기쁨은 조용한 분위기 속에만 깃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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