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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이봐 해보기나 했어?”라고
다그친 CEO

-가출을 밥 먹듯 한 골칫덩어리 시골 소년, 정주영

by 물처럼

*정주영(1915~2001)= 강원도 통천 출생. 현대그룹 창업자이자 초대 회장. 1995년 미국 포브스 선정 세계 9위 부자에 등극됨.



슬하에 6남 1녀를 둔 농사꾼 아버지는 장남 정주영이 고향을 지키며 대를 이어 농사짓고 살기를 원했다. 그래야 집안을 온전히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아버지를 돕고 지내던 정주영은 농사일이 너무 힘들고 재미가 없었다.


농사꾼이 자신의 미래가 아니라고 생각한 그는 돌연 가출을 결행한다. 강원도 통천 고향 집에서 빠져나와 함경북도 청진을 향해 북으로 가다 도중에 차비가 떨어져 탄광촌 근처 철도 공사장에서 막노동을 했다. 이것이 그의 첫 가출이다. 얼마 후에는 남쪽 금강산을 향해 또 집을 나갔다. 하지만 일거리를 찾지 못하고 사기만 당하고는 아버지한테 붙잡혀왔다.


세 번째 가출은 간 큰 시도였다. 아버지의 소 판돈 70원을 훔쳐 서울로 도망쳤다. 주산과 부기 학원에 등록했으나 아버지한테 붙잡혀 집으로 끌려왔다. 아버지는 아들을 앉혀놓고 이렇게 타일렀다. “대학을 나온 놈도 실업자가 되는 판국에 너 같은 조선 놈이 서울 올라간다고 해서 다 성공하는 건 아니다. 게다가 너는 우리 집 장남이다. 농사지으며 집안을 건사해야지.”


그럼에도 정주영은 시골이 싫었다. 부농의 아들인 초등학교 친구와 함께 네 번째 가출을 시도했고, 또 잡혀왔다. 바깥바람에 단단히 물든 그에게 가출은 계속될 수밖에 없었다. 인천으로 도망친 이후에야 아버지는 포기하고 만다. 그는 인천 부둣가에서 막노동을 하다 서울로 향했다. 고려대학교 본관 건설 공사장과 용산역 근처 엿 공장(지금의 오리온) 건설 현장에서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집과 가족에게 정을 붙이지 못하고 가출을 밥 먹듯 하는 아들을 둔 부모의 심정은 어땠을까? 성공한 뒤에야 편하게 웃어넘겼겠지만 당시에는 참담했을 것이다. 집안 1호 보물을 판 돈까지 훔쳐 도망갔으니 아들의 장래가 무척 걱정스러웠을 것이다.


가출한 정주영은 다행히 객지에서 누구보다 성실하고 주변에 신뢰를 주는 청년으로 성장했다. 서울 신당동의 쌀가게 복흥상회 주인은 그를 점원으로 데리고 있다 성실함에 감동한 나머지 가게 운영을 아예 그에게 맡길 정도였다. 이후 정주영은 아현동에 자동차 수리공장을 차려 제법 재미를 보았으나 화재로 몽땅 잃고 말았다. 재기에 성공해 신설동에 다시 정비공장을 차렸다. 일제의 기업정리령으로 정비공장을 넘긴 뒤에는 한동안 운송업을 하기도 해다.


정주영의 사업 성공은 무엇보다 강한 자신감에 바탕을 두고 있다. “하자 하면 된다.” 무슨 일을 하든 최선을 다하면 반드시 성공한다는 믿음의 소유자였다.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라는 그의 인생 좌우명이 말해준다. 현대건설의 고령교 건설공사 스토리에 그의 이런 사업 정신이 고스란히 스며있다.


그는 미군정 시기이던 1947년 건설회사인 현대토건사를 차렸다. 현대건설, 현대그룹의 모태라 할 수 있다. 한국전쟁이 터지고, 주한미군에서 통역장교를 하던 동생의 도움으로 주한미군 관련 공사를 집중 수주한 덕분에 회사가 급성장했다. ‘10대 건설사’를 향해 속도전을 벌이던 정주영에게 위기가 닥쳤다.


그는 전쟁이 끝날 무렵 낙동강 고령교 복구공사를 따냈다. 정부 발주 공사로는 사상 최대 규모(공사 비용 5백47억 원)여서 직원들은 사기 충천했다. 하지만 난관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전쟁으로 폭파된 교량이라 말만 복구공사지 실제로는 신축 공사나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큰 공사를 해 본 경험이 없는 데다 건설 장비가 부족해 도무지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인플레이션으로 건설자재 값과 인건비가 급증했고, 설상가상으로 홍수로 나 애써 박아놓은 교각이 몽땅 떠내려가는 불운까지 겹쳤다.


주변 사람들이 “이것으로 정주영은 끝났다, 사업을 빨리 접어야 한다”라고 입을 모으고, 인부들이 월급 안 준다고 파업에 돌입했지만 젊은 사장은 포기하지 않았다. 사업에서 신용을 잃으면 영영 끝이라는 생각에 어떤 일이 있어도 공사를 완수하기로 다짐한다. 자동차 정비공장 부지를 처분하고, 형제들의 집까지 팔아 돈을 마련해 공사를 재개한 끝에 납기를 거의 맞추는 데 성공한다. 모두가 기적이라고 했다. 손해가 컸지만 당국의 신뢰를 얻을 수 있었고, 이 덕분에 회사가 승승장구할 수 있었다.


정주영은 지레 포기하는 사람을 제일 싫어했다. 간부들에게 뭘 시켰는데 불가능하다며 주저할 경우 이런 말로 다그쳤다.


“이봐 채금자(책임자), 당신 해보기나 했어?” 길이 없으면 길을 찾아야 하고, 찾아도 없으면 길을 닦아서라도 나아가야 한다는 게 그의 신조였으니 행동에 옮기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런 생각과 행동은 특유의 자신감 덕분이다. 시골에서 맨손으로 뛰쳐나와 혼자 힘으로 기업을 일군 그만의 생존법이라고 해야겠다. ‘불도저 사업가’ 정주영은 이런 말을 남겼다.


“나는 무슨 일을 시작하든 된다는 확신 99%와 반드시 되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 10% 외에 안될 수도 있다는 불안은 단 1%도 갖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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