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33> 기병장교, 전쟁터에서도 인문독서에 빠지다

-수학을 못해 삼수로 육사 간 하원의장 아들, 윈스턴 처칠

by 물처럼

*윈스턴 처칠(1874~1965)= 영국의 정치인. 1940년 총리가 되어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장식. 1953년 노벨 문학상 수상.



윈스턴 처칠은 영국인들에게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다. 역사인물 인기 조사를 하면 대부분 윌리엄 셰익스피어나 아이작 뉴턴보다 앞선다. 파란만장했던 청년 시절, 히틀러를 제압한 전쟁 영웅, 노벨 문학상 수상, 특유의 유머 감각 등이 한데 어우러지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처칠의 어린 시절을 더듬어보면 “학교에서 꼴찌를 못 면하던 아이가 어떻게 이토록 위대한 인물이 되었을까?”라는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학창 시절 그는 소문난 열등생, 낙제생, 문제아여서 부모를 걱정시켰다.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의 처칠은 명백한 학교 부적응자였다. 그는 회고록 ‘윈스턴 처칠, 나의 청춘’(임종원 옮김, 도서출판 행북, 2020)에서 학창 시절을 ‘내 삶에서 기쁨이 하나도 없는 우울한 시기였다’라고 표현했다.


처칠은 영국 최고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공작 가문의 할아버지는 아일랜드 총독을 지냈으며, 아버지는 하원의장 겸 재무장관을 역임했다. 미국 출신인 어머니는 상류층 사교계를 주름잡는 여성이었다.


7세 때 가정교사가 있는 집을 떠나 세인트제임스 스쿨이란 기숙학교에 들어갔다. 상류층 자녀만 수용하는 신설 학교로, 하루 7~8시간 수업에다 축구나 크리켓 같은 운동을 의무적으로 해야 했다. 하지만 소년은 적응하지 못했다. 도무지 공부가 싫었고 성적은 바닥이었다. 선생님에게 대책 없이 대들고 반항하는 문제아였다. 2년이 지나 건강이 나빠지고 병에 걸리자 병원 진료를 받아야 했으며, 결국 부모는 자유로운 분위기의 다른 학교로 옮겨 3년을 보냈다. 그곳에서도 학업 성적은 형편없었다.


12세가 되어 중등학교 과정인 해로우 스쿨에 진학했지만 낙제생 딱지를 달고 살았다. 역사나 문학, 작문은 재미가 있고 자신도 있었지만 수학과 라틴어는 죽도록 하기 싫었다. 성적이 가장 나쁜 열등반에 배정되었는데, 그곳에서도 꼴찌 수준이었다. 회고록에서 그는 13세 때의 치욕을 이렇게 전한다.

“1887년의 일이다. 당시 아버지 랜돌프 처칠 경은 하원의장과 재무장관 직에서 막 사임하긴 했지만 여전히 정계 일선에 있었다. 학교 방문객들은 늘 학교 계단에 서서 학생들의 점호를 지켜보곤 했는데, 내가 지나갈 때마다 ‘처칠 경의 아들은 왜 만날 꼴찌야?’라는 기분 나쁜 말을 들어야 했다. 이 꼴사나운 상황은 거의 1년이나 계속되었다.”


아버지는 내심 아들이 법률가가 되길 원했지만 일찌감치 포기하고, 샌드허스트 육군사관학교 진학을 주문했다. 해로 스쿨 4년 반 가운데 3년을 군사 예비반에서 보냈지만 그에게 육사 진학은 무척 힘든 관문이었다. 라틴어, 수학, 영어, 프랑스어, 화학 등 5개 과목 중 필수 과목인 수학은 크나큰 난관이었다. 첫 번째 시험에서 수학 성적을 2500점 만점에 500점도 받지 못해 낙방했다. 두 번째 시험에서도 수학 때문에 떨어지자 육사 입시 전문 고액 학원에 등록했다.


처칠은 세 번째 도전 끝에 간신히 합격할 수 있었다. 그것도 보병과보다 커트라인이 낮은 기병과에 들어가야 했다. 아버지는 보병과를 강력히 희망했으나 달리 방법이 없었다. 다행히 본인은 기병 장교가 되는 것이 싫지 않았다. 육사는 적성에 맞았으며, 수학과 라틴어는 의무 이수 과목이 아니어서 더 이상 그의 발목을 잡지 않았다. 입학은 95등으로 겨우 했지만 졸업은 8등으로 명예롭게 할 수 있었다.


육사를 졸업하고 장교 계급장을 달았다고 해서 성공가도에 들어선 것은 당연히 아니다. 그의 출세 비결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독서를 빼곤 상상하기 어렵다. 그는 소문난 독서광이었다. 그토록 학교 공부가 싫었지만 영어 독서와 작문은 괜찮았다. 해로 스쿨에서 열등반에 속해 있었으나 영어 책을 읽고 문장을 분석하는 공부는 즐겼다. 친구에게 에세이를 대신 써주기도 했다. 육사 시절에도 독서를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장교 임관 후 전쟁터에 가서도 책을 끼고 살았다.


특히 인도 방갈로르에 근무하던 22세 무렵 독서와 공부에 대한 욕구가 강하게 솟구쳤다. 각종 역사서와 그리스로마 철학서는 물론 동서양 문학 작품에 심취했다. 다음은 그의 회고록에 나오는 말이다.


“인도의 햇볕이 뜨겁게 내리쬐는 한낮에 마구간의 일과를 마치면 저녁 그림자가 폴로 시간을 알리기 전까지 기번의 ‘로마제국 흥망사’에 푹 빠져 있었다. 이 책의 첫 장부터 끝까지 탐독하면서 의기양양하게 내달렸다. 페이지마다 여백에는 내 의견을 써 놓았다.”


이후 처칠은 어떤 근무지에서건 책을 친한 친구로 삼았다. 여러 지역에서 종군기자를 자청해 전쟁 상황을 영국 신문에 잇따라 투고할 수 있었던 것은 특별한 독서 이력 덕분이었다. 남아프리카에서 발발한 보어전쟁의 종군기자로 활동하던 중 포로로 잡혔다가 용감하게 탈출한 사건은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고 말았다. 갑자기 유명인사가 되었고, 그 덕분에 약관 26세에 하원의원 배지를 달 수 있었다. 학창 시절 열등생이자, 문제아였던 청년은 이후 승승장구, 종횡무진이었다.


제1차, 2차 세계대전 시기 정부에서 끊임없이 요직을 맡는다. 해군장관, 군수장관, 전쟁장관, 항공장관, 식민지국무장관, 재무장관(2차례) 총리(2차례)…. 은퇴 후에는 회고록 ‘제2차 세계대전’의 명성에 힘입어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그는 또 인기 최고의 연설가였으며, 유머 감각의 천재였다.


독서의 힘이 작용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32> 조선의 독서왕, 58세에 과거 급제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