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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angmagazine May 24. 2021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 도덕_김종민

_5월호 <도덕의 상대성과 지구화>


1. 강아지와 버스          

버스에 타고 있는 강아지의 모습을 상상해본 적이 있는가? 이는 강아지가 케이지에 갇힌 채로 주인 손에 들려있는 모습을 말한 것이 아니다. 버스 문이 열리면 스스로 올라타 주인 발 앞에 앉고, 주인이 일어나면 내릴 때를 알아챈 듯 문 앞에서 대기하는 모습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천재 강아지 이야기가 아니다. 체코에 교환학생으로 있을 때 직접 목격한 장면이다. 강아지 주인과 다른 탑승객들은 이런 모습을 당연한 것처럼 여기고 있었다. 한국이었다면 상상도 못 했을 일이 어떻게 가능한지 현지인 친구에게 물어봤다. 그러자 친구가 체코 사람들은 자신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어떤 일이라도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고 말했다. 강아지가 버스를 타는 일은 자신에게 피해가 돌아오지 않으니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한국인이었던 나는 강아지로 인해 다른 사람이 피해를 받지 않을까 미리 걱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것이 당연한 생각이라 여겼다. 반면 체코인이었던 친구는 자신이 피해를 받지 않는다면, 타인의 자유를 존중하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것이 강아지를 버스에 태우는 일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순간 도덕관의 차이를 깨달은 나는 체코에 있음을 다시 한번 실감했다.          



2. 도덕이란 무엇일까?          

우리는 도덕을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가? 어릴 때는 도덕이란 그저 좋은 것 혹은 착한 것쯤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고등학생은 공부하는 것이 도리이자 도덕”이라는 선생님의 말씀을 들은 후, 과연 도덕적인 것이 반드시 긍정적인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도덕을 ‘사회의 구성원들이 양심, 사회적 여론, 관습 따위에 비추어 스스로 마땅히 지켜야 할 행동 준칙이나 규범의 총체’라고 설명한다. 여기에는 좋은 것이나 착한 것이라는 가치판단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사회 구성원들이 마땅히 지켜야 할 행동이라는 의미만을 내포하고 있다. 즉 가치판단을 하는 것은 구성원들의 몫이다. 그렇기 때문에 도덕이 항상 같은 모습을 하고 있지는 않다. 시대에 따라, 구성원에 따라, 문화에 따라 도덕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새로운 모습들로 탈바꿈한다.     

도덕 원리가 변화하는 모습은 선거철마다 보이는 모습과 비슷하다. 선거철만 되면 야당은 정권 심판이라는 명분을 내세우며 자신들이 도덕적으로 옳다고 주장한다. 기존의 여당은 도덕적으로 옳지 않으니 자신들을 대안으로 뽑아야 한다면서 말이다. 이는 나라나 시대를 가리지 않는다. 이런 변화 양상은 헤겔의 변증법을 닮았다. 독일의 철학자인 헤겔은 정반합의 과정을 거친 세계가 변증법적으로 변화했다고 설명한다. 정반합의 원리는 다음의 과정으로 이뤄진다.     


1. 기존에 존재하던 진리인 을 반박하는 의 진리가 등장한다.

2. 이 둘은 치열한 논쟁 끝에 합의하여 새로운 을 탄생시킨다.

3. 시간이 지나 이것은 다시 하나의 이 되고 다시 새로운 의 반박을 마주한다.   

     


도덕 역시 이와 같은 과정을 거치며 변화해왔다. 국가를 통제하는 법 역시 도덕 원리의 변화에 따라 달라졌다. 함무라비 법전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도덕 원리에 입각해 있었다. 누군가 상대방에게 피해를 주면 똑같이 되돌려주었다. 그러나 오늘날 법은 그렇지 않다. 이는 ‘인간의 기본권’이라는 새로운 도덕 원리가 그 자리를 대체했기 때문이다. 만약 현대 국가에서 함무라비 법전 같은 법이 존재한다면, 인간의 기본권을 무시했다는 비판을 받을 것이다.


          

3. 생활세계변화가 시작되는 곳          

그렇다면 도덕의 변증법적 변화는 어디에서 나타날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 하버마스의 현실 세계 구분을 살펴보고자 한다. 하버마스는 세상을 ‘체계’와 ‘생활세계’로 구분했다. ‘체계’ 영역에는 정치와 경제의 체계가 있으며, 체계 고유의 규칙에 따라 작동한다. ‘생활세계’ 영역은 ‘사적 영역’과, ‘공론의 장’으로 이뤄져 있으며 언어를 통한 소통에 따라 작동한다. 학교나 언론이 대표적인 생활세계의 장소이며, 우리가 실제로 살아가는 삶의 일부이다. 서로 다른 두 영역은 노동력과 화폐, 권력과 서비스를 주고받으며 상호작용한다. 이를 도식화하면 다음과 같다.           


             

하버마스가 주목한 것은 생활 세계인 사적 영역과 공론의 장이다. 체계와 생활세계의 가장 큰 차이는 작동 원리이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각각 체계 내부의 규칙과 언어에 의한 상호작용으로 이뤄진다. 체계 내부의 규칙은 법이나 경제 원리와 같은 것으로, 상호작용의 변화가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반면 생활세계의 언어는 누구나 의사소통을 위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수단이다. 이는 어떤 사람이든 자유롭게 ‘반’의 입장을 표현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정’을 극복하기 위한 움직임은 생활세계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4. 생활세계의 확장          

사적 영역에서 등장한 의견들은 공론의 장에 모여 변화의 씨앗이 되었다. 그러나 공론의 장이 위협받을 때면 변화는 열매를 맺기 어려웠다. 그래서 ‘반’의 의견은 항상 치열해야만 했다. 히틀러의 독재를 벗어나기 위해 레지스탕스는 음지에서 움직여야만 했고, 3.1 운동 역시 일본 군경의 감시를 피해 다니며 힘을 모았다. 이처럼 새로운 움직임은 항상 위태로웠고 위협받기 일쑤였다.     

그러나 인터넷과 스마트폰의 등장으로 그들은 이러한 위협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온라인이라는 새로운 소통의 장은 언어와 마찬가지로 많은 사람이 접근할 수 있는 공간이 되었다. 사람들은 더 이상 몰래 모이거나 움직일 필요가 없어졌고 자신과 뜻이 통한다면 지구 정 반대편에 있다 할지라도 동료가 되어 의견을 공유할 수 있게 됐다. 2001년 프랑스 배우 브리지트 바르도는 지구 반대편에 있는 한국의 개고기 문화를 보고 야만인 같다고 비판했다. 한국 인터넷에는 이에 동조하는 의견과 비판하는 의견이 대립했다. 이 사례의 옳고 그름을 떠나 우리는 온라인이 어떻게 새로운 공론의 장으로 작동하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스마트폰은 이 공론의 장을 우리의 손바닥 안으로까지 확장한다. 이제 스마트폰만 있다면 SNS를 통해 언제 어디서나 자신의 의견을 개진할 수 있게 됐다. 끊임없이 발생하는 소통은 도덕 원리의 끊임없는 정반합을 일으킨다.     



5. 살아 움직여야만 하는 도덕          

그렇다면 도덕은 왜 변화해야만 할까? 변하지 않는 절대적인 가치가 있다면 모두가 그것을 향해 나아가면 되지 않을까? 이는 불가능한 이야기다. 도덕이란 결국 인간에 의해 탄생한 것이다. 언젠가 죽게 되는 인간은 불안정함을 갖고 있다. 불안정함에서 탄생한 도덕은 필연적으로 불안정함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러면 신의 말씀을 섬기는 종교는 어떠한가. 종교의 정당성이나 타당성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종교의 내용을 해석하고 행동하는 주체가 결국 인간이라는 점에 주목하는 것이다. 수많은 폭력이 왜곡된 해석에 따라 행해졌다. 믿음에 따라 성전을 일으킨 십자군을 떠올려 보라. 그들은 원정길을 떠나는 동안 이슬람교도들만이 아닌 자국민 또한 약탈하고 폭행했다. 신의 나라를 건국하기 위해 폭탄 테러를 일으키는 사람들을 보라. 그들이 절대적이라 믿는 종교와 이에 근거한 도덕을 정말 절대적인 것이라 할 수 있을까.     

그렇기 때문에 SNS의 발달과 도덕의 지구화가 중요하다. 세계가 다른 나라에 무관심하던 시절, 독재와 자유 억압은 비일비재했다. 국경 밖으로 입단속만 잘한다면 독재자는 무한한 힘을 차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세계화 시대에는 그렇지 않다. 사람들은 인터넷을 통해 자국 상황을 국외 사람들에게 생중계한다. 그들은 그 나라 국민에 공감하고 같이 분노한다. 억압받던 ‘반’의 입장은 세계의 지지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최근 발생한 미얀마 사태는 이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폭력은 언제나 자신들을 정당화해왔지만, 세상은 그것이 폭력임을 알고 있다. 그들은 세계의 시민으로서 하나의 생활세계 아래 놓이게 되었다. 끊임없는 소통은 수많은 도덕 원리를 무너뜨리고 새롭게 탄생시킨다. 수없이 많은 세포가 죽고 탄생하며 살아 움직이는 우리 인간처럼.




7월호 <과학기술과 유토피아> 투고글, 그림을 받고 있습니다.

_과학기술의 발전은 유토피아를 실현시키는가?

https://blog.naver.com/changmagazine/222348207818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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