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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angmagazine May 17. 2021

인종주의에 반대하는 고정관념_현민철

_5월호 <도덕의 상대성과 지구화>


'차이'는 필연적으로 도덕의 상대성을 수반할까요?

피부색의 차이가 어떻게 생명의 존엄성을 파괴하는 행위를 허용할 수 있을까요?

인종주의를 허용하는 '고정관념' 대한 어느 대학생의 이야기를 들어보세요.




 2020년 5월 25일 미국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에서 흑인 조지 플로이드는 백인 경찰에게 ‘과잉진압’이라는 간단한 단어로 표현하기 힘든 일을 당했다. 이에 미국 전역에서 인종차별 반대 시위가 일어났고, “Black Lives Matter”의 시발점이 되었다. 하지만, “Black Lives Matter”을 바라보는 전 세계인의 시선은 곱지만은 않다. 우선 백인 우월주의자들은 질서를 어지럽히는 존재로 취급했으며, 트위터나 인스타그램에선 “흑인들은 아시아인을 무시한다”라는 식으로 “Black Lives Matter”의 정당성과 도덕성을 지적했다.


 그 두 가지 주장 모두 쉽게 반박 가능하다. 우선, “사회질서를 어지럽히는 존재”라는 주장은 민주주의의 원칙에 어긋난다. 기본적으로 사회질서라는 것은 현재 사회를 배경으로 밖에 말해지지 않는다. 즉 현재 사회를 점우하고 있는 특정 지식이나 이데올로기를 기반으로 말할 수밖에 없다. 현재 사회의 가장 큰 이데올로기는 다니엘 벨의 책 제목 <이데올로기의 종원>처럼  “이데올로기의 시대는 지났다"이다. 하지만, 슬라보예 지젝이 말하듯 “이데올로기의 종원”이라는 표현만큼 가장 이데올로기적인 표현은 없다. 쉽게 말해 ‘이데올로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만을 남기고 모든 이데올로기를 부정한다, 그리고 ‘이데올로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이불을 들추는 순간 자본주의와 인종주의. 가부장주의가 남아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다. 대중들이 페미니즘을 맑시즘처럼 이데올로기로써 인식하지 않고 시민운동으로써 인식하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데올로기는 시대착오적이다”라는 명제를 들추고 그 밑에 감추어진 지배 이데올로기를 마주해야 한다.


 이제 트위터나 유튜브는 젊은 세대들을 유혹하는 키워드로 득실거린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키워드가 “내로남불”이다. 한 정치인에서 시작한 짧은 문장은 대한민국 국민을 장악했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사태를 계기로 내로남불은 토론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되었다. 하지만, 내로남불의 논리야말로 아고라에서 추방당해야만 한다. 흔히 ‘피장파장의 오류’라고 불리는 논리적 오류이기 때문이다. 피장파장의 오류는 발언의 진위 여부나 타당성은 무시한 채 발언자를 위선자로 만들어 논점을 흐린다. 이 논리의 기본적인 명제는 “A라는 상항에 처해 있어야 만이 A에 대해서 말할 수 있다”이다. 이것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명제인지 증명하는 데에 철학적인 증거를 가지고 올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이 명제를 받아들인다면 유대인임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행위를 비판한 하워드 진, 백성을 가엽게 여겨 훈민정음을 창제한 세종대왕, 남성이면서 페미니스트인 영화배우 조셉 고든-레빗, 이들 모두를 위선자라고 말해야 한다. 좀 더 과격하게 말하자면 내로남불의 논리는 인류가 오랜 세월 지속해 온 '공감'이라는 감정을 무시해야 한다. 조두순 사건을 보며 분노하는 부산 시민과 세월호 유가족의 슬픔을 함께하는 전 세계 모든 사람들을 부정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로남불의 논리가 강력하게 작동하는 이유는 지배 이데올로기와 고정관념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고정관념에 얽매인 사람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고정관념을 문제 삼지만, 그들이 인지하지 못한 사실이 있다. 바로 ‘고정관념은 나쁘다’라는 고정관념이다. 고정관념이란 피장파장의 오류처럼 논리적 오류를 일으키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고정관념이 발생하는 이유는 모든 사물을 백과사전에 집어넣으려던 근대의 DNA가 우리의 지식 체계에 남아있기 때문이다. ‘언어는 사물에 대한 폭력’이라는 유명한 말처럼 우리는 계속해서 언어라는 사슬을 던져 자연을 붙잡으려 했다. 하지만, 언어적 결함에 의해 포획되지 않는 부분이 생겨났고,  그 빈 부분을 지우기 위해 논리적 비약을 사용했다. 그 논리적 비약의 이름이 고정관념이다. 그렇다면 모든 고정관념이 없어진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식 체계 전체는 흔들릴 것이다. 지옥의 몰락이 천국의 도래를 의미하지 않듯 고정관념이 사라짐은 완전한 지식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논리적 비약을 일으키게 한 지식 체계 외부의 공포를 마주해야 한다.


 고정관념은 단순히 논리적 오류를 일으키는 나쁜 것으로만 규정할 수 없다. 왜냐하면 지식 체계의 구멍들을 마주한다면 “내가 살고 있는 이 체계는 균열이 존재하고, 그 균열을 막기 위해 정의 혹은 당연함으로 받아들여지던 것들은 권력이 만들어 놓았다”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기 때문이다. 이 과정은 극심한 우울증을 동반하며 심지어는 정신과는 소용없음을 깨닫게 한다. 사회적으로 봤을 때 고정관념의 붕괴는 권력의 정당성의 붕괴이며 우울증 환자의 대량 발생을 일으킨다. 그렇기에 많은 사회들이 고정관념을 수호하는 것이다. 인종차별 문제도 마찬가지다. 2017년 개봉한 조던 필 감독의 <겟 아웃>은 백인이 흑인에게 품고 있는 동경을 들추었다. <겟 아웃> 이전에 할리우드에서 볼 수 없는 장면이 존재한다. “사실 백인은 흑인보다 신체적으로 뒤떨어지며 그들은 더럽고 미천한 것으로 취급한 흑인을 동경해”를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할리우드 영화에서 백인보다 신체적으로 우월한 흑인들은 수도 없이 등장했다. 하지만, 그들은 백인에게 당하는 역할이거나 백인을 도와주는 역할에만 머물 뿐이었다. <겟 아웃>의 개봉이 미국에서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평론가들 사이에서도 이 영화를 놓고 엄청난 대립각을 세운 이유도 여기에 있다. <겟 아웃>의 개봉으로 인해 할리우드는, 미국 사회는, 백인 사회는, 고정관념은 노출되었으며 “백인이 흑인보다 우월하다"라는 인종주의 또한 흔들렸다.


 영화 <겟 아웃>은 한국에서 “이게 뭐가 새롭다는 거지? 왜 미국에서 이게 문제적 작품이지?”라는 평을 받았다. 한국인들이 백인 사회나 흑인의 신체적 우월함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누구나 아는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미국 4대 스포츠 중 MLB와 NHL의 유색인종 비율은 여전히 미미한 수준이지만, NBA는 77퍼센트, NFL의 흑인 선수 비율은 68퍼센트에 이른다. 야구와 아이스하키가 많은 돈이 든다는 것과 데뷔 전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을 생각하면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다. 또한 메이저리그에선 지난 20년 동안 40번의 MVP 투표 중 유색인종은 23차례나 ‘최고의 선수’ 자리를 차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겟 아웃>이 미국 내에서 문제적 작품이 된 이유는 ‘입 밖으로 꺼내기 힘든 사실’이기 때문이다. 즉 모두가 알고 있으나 공공연하게 말할 수 없는 사실 말이다. <겟 아웃>과 비슷한 형태로 폭로 전문 언론사인 <위키 리크스>가 있다. <위키 리크스>의 폭로 또한 그리 새로운 사실들은 아니다. 지금은 첼시 매닝이 된 브래들리 매닝은 이라크 전쟁에서 미국이 이라크에게 저지른 만행을 폭로했다. 미국 사회쁜만 아니라 전 세계가 주목한 폭로였지만. “몰랐던 사실이야”라고 말할 수 있는가? “매닝의 등장 이전 까진 나는 아무것도 몰랐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미국이 중동에 저지는 폭력과 학살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단지 미국이라는 거대한 국가에, ‘천조국’이라는 자본주의의 우상이 비도덕적이고, 파시즘적 존재임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뿐이다. 위키 리크스는 2017년 CIA가 스마트폰이나 전자기기를 통해 전 세계인을 해킹하고 있음을 폭로했다. 하지만, 이 사실 또한 새롭지 않다. 스노든의 사례를 들 필요도 없다. 필자가 어렸을 때는  “미국은 우리 발밑에 개미가 뭘 하고 있는지도 알아”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이 말은 미국이 우리를 감시하고 있음을 인정하는 증표이며 또 동시에 감시당함을 거북하게 여기는 말이다.


 <위키 리크스>의 폭로나 <겟 아웃>은 새로운 지식을 전달해 주지 않았다. 오히려 더 대담한 일을 했다. 모두가 알고 있으나 권력에 의해, 사회적 분위기에 의해, 고정관념에 의해 말하지 못하는 사실들을 얘기했다. 기존의 지식 체계에 시한부 선고를 내린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순순히 물러나지 않는다. 심리학자 엘리자베스 퀴블러-러스는 <죽음과 죽어감>에서 인간이 죽음을 받아들이는 단계를 설명한다. 고정관념이 죽음을 받아들이는 과정 또한 이와 유사하다. 우선 자신이 고정관념이라는 것을 부정하고, 자신을 위협하는 존재들을 불순론자로 취급하며 분노한다. 자신의 일부만이 고정관념이라고 주장하며 생존을 위해 협상을 시도한다. 이후 죽음을 받아들이며 우울에 빠지고, 완전히 받아들이는 수용을 거친다. 하지만, 대부분의 고정관념은 두 번째 단계인 분노 이후로 넘어가지 않는다. 협상 단계에 도달했을 땐 고정관념의 파괴자들을 극단주의자로 몰아가며 협상을 진행한다. 그 결과 가부장주의, 자본주의, 소비주의. 인종주의는 여전히 살아남았다. 그중 인종주의는 더 이상 전통적인 인종주의가 아니다.


 “코로나 19의 등장으로 세상은 변했다"라는 식의 격언이 유행처럼 쓰인다. 필자는 이 격언을 싫어한다. 왜냐하면 코로나 19 이후 우리가 겪는 일들 대부분은 예측 가능했기 때문이다. ZOOM을 통한 화상 수업/회의, 1인 가구와 1인 서비스의 발달, 무인 서비스의 확산도 마찬가지다. 심지어 인종차별의 삼화 또한 계속해서 얘기되고 있었다. 테오도어 아도르노가 1967년 오스트리아 빈 대학에서 ‘극우주의의 부상’을 주제로 한 강연은 52년이 흘러 『신극우주의의 양상』,이라는 이름으로 출간됐다. 아도르노는  『신극우주의의 양상』,에서 "파시즘의 전제조건들이 이전과 마찬가지로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에서 극우주의의 잠재성이 설명될 수 있다"는 주장을 전개했다. 그뿐만 아니라 슬라보예 지젝은 유럽 우파의 행적을 ‘나치즘에 반대하는 파시즘’이라 표현했다. 코로나 19로 인해 동양인에 대한 혐오, 외국인에 대한 혐오가 늘어나면서 서양인들은 동양인에게 이 모든 책임을 돌렸고, 동양인들은 중국에 이 모든 책임을 돌렸다. 이시야마 하지메의 만화 <진격의 거인>에선 이와 유사한 장면이 등장한다. ‘유미르의 백성 보호단체’는 국제토론회에서 엘디아인의 인권을 주장하며 파라디 섬의 인권을 무시하는 발언을 한다.  


 우리는 각국에서 죽어간 ‘유미르의 백성’ 난민들에게 원조를 요구하는 바입니다! 그 난민들이 엘디아인이긴 하지만 엘디아 제국의 위협 사상하고는 연이 없습니다! 그들은 그냥 엘디아 제국에게 교배를 강요당한 불쌍한 피해자예요!! 증오해야 하는 건 섬의 악마 놈들입니다!! 증오해야 하는 건 100년 전에 섬으로 도망친 악마!! 우리의 적은 그 섬의 악마입니다!!     


 엘디아인이라는 상상의 민족이 등장하지만 현 상황과 동떨어진 말이 아니다. 서양이 코로나 사태를 이유로 동양에 대한 혐오를 드러내자 한국의 누리꾼들은 “우린 중국인이 아니야”라는 식의 논리를 펼친다. 그것은 피해자에서 고발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피해자이면서 가해자가 되는 행위이며 사건의 본질을 흐리는 행위다.


 코로나 사태 이후 인종주의는 파시즘과 비슷해졌다. 북미에 존재하는 흑인은 크게 4가지로 분류된다. 아프리카에서 흑인 대이동 시기에 건너온 흑인들의 자손인 ‘아메리칸 흑인’, 식민지 시대에 노예선을 타고 건너온 이들의 후손인 ‘케리비안 흑인’, 아프리카에서 건너온 흑인들의 1세대, 2세대를 부르는 ‘아프리카 흑인’, 영국 및 유럽에서 건너온 ‘프랑스계 흑인’으로 나뉜다. 네 그룹에 대한 차별은 강도와 방식, 이유에서 차이가 존재한다. 아메리칸 흑인들은 아프리카 흑인이나 동양인을 차별한다. 그들을 차별하는 이유는 피부색이라기 보단 그들이 외부인이기 때문이다. 마치 한국인이 베트남인을 차별하면서 검다고 놀리는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형태는 오래전 백인종이 인종차별을 정당화하기 위해 피부색에 등급을 매긴 것과 유사하다. 점점 인종주의는 민족주의와 결합해 파시즘의 양상을 띄고 있다. 좀 더 과격하게 말하자면 파시즘은 민족주의와 인종주의라는 믿음직한 부하를 두고 있는 셈이다. 민족주의를 이용해 공개적인 차별정책을 펼치고, 인종주의를 이용해 과격하고 물리적인 차별을 일삼는다. 이 모든 것은 정책이라는 이름으로, 정의라는 틀 속에서 진행된다.


 우리는 이러한 모든 부당함에 대해 맞서야 한다. 그것이 우리를 우울증에 빠뜨리더라도, 우리는 마주해야만 한다. 현실 권력이 숨기고 있는 진실을, 권력의 재생산을 위해 만들어 낸 고정관념을 마주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또다시 적당한 선에서 합의를 보고, 현실 권력은 새로운 고정관념을 만들어낸다. 이름만을 바꾸는 정당들처럼 그들은 자신의 이름을 바꾸고 “세계는 변했어. 네가 말하는 그 주장은 너무 시대착오적이야. 근데 너는 왜 이렇게 비도덕적이니”라는 식으로 등장한다. 우리는 모든 형태의 파시즘에 맞서야 한다. 나치즘에 반대하는 파시즘이라도 말이다.




7월호 <과학기술과 유토피아> 투고글, 그림을 받고 있습니다.

_과학기술의 발전은 유토피아를 실현시키는가?

https://blog.naver.com/changmagazine/222348207818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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