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5월호 <도덕의 상대성과 지구화>
필연적으로 나와 다른 기준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과 맞닿을 수밖에 없게 하는 '지구화'라는 변화를
우리는 어떠한 태도로 받아들여야 할까?
전통문화와 현대 윤리의식이 충돌할 때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여러분은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모두가 꿈꾸는 나라인 ‘드림랜드’가 있다. 이 나라는 평생 먹고 마실 음식들과 좋은 잠자리를 무료로 제공해주고, 각종 헬스케어 시스템을 도입해 국민들의 건강과 행복을 책임진다. 또한 누구나 원하는 일을 할 수 있고, 꿈을 쉽게 펼칠 수 있는 발판을 만들어준다. 하지만 이것을 모두 향유하기 위해서는 드림랜드의 전통문화인 ‘컷더텅’을 거쳐야 한다. 말 그대로 혀의 일부분을 잘라내는 의식이다. 잘라낸 혀의 일부분을 그들이 모시는 ‘신’에게 바치고 기도를 올린다. 그것을 거치지 않으면 그 나라의 모든 문화를 누릴 수 없고, 결국에는 추방당한다. 드림랜드의 서쪽에는 또 다른 나라가 하나 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실수로라도 발을 들이고 싶지 않아 기피하는 ‘페인빌리지’이다. 이 나라에는 드림랜드와 같이 몸을 해치는 전통의식은 없으나, 생명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삭막한 땅에서 국민들은 굶주리며 살아간다.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도둑질을 하는 사람들이 빈번하고, 마땅한 잠자리가 없어 밤이 되면 길거리에서 추위에 떨며 잠이 드는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이곳은 주로 온갖 지역에서 돈 없고 집 없는 방랑자들이 오기 때문에, 서로의 태도와 행동 양상들을 이해하지 못해 폭력성을 띤 싸움이 빈번하게 일어난다. 그렇기에 많은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 페인빌리지를 피해 드림랜드에 가기 위해 애쓴다. 혀를 잘라서라도 살기 편한 곳으로 가고 싶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이 과연 옳은 것일까? 드림랜드의 신체에 대한, 종교에 대한 자유권을 침해하는 전통문화가 과연 그곳이 ‘살기 좋은’, ‘편안한’ 사회라는 이유로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한 답은 사람마다 모두 다를 것이다. 인간의 자유권, 존엄성이 우선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평생을 살아가야 할 곳인데 나중을 위해서라면 그런 고통쯤은 참을 수 있다고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당신이라면 어느 나라를 선택할 것인가?
우리가 공감할 수 있는 더 직접적인 이야기를 해보겠다. 횡단보도에 길을 잃은 강아지가 한 마리 있다. 그리고 저 멀리서 트럭이 한 대 오고 있다. 한 남자가 강아지를 구하기 위해 신호등의 불이 빨간색임에도 불구하고 달려갔다. 결국 강아지를 구했지만, 트럭을 몰던 운전사는 속도를 줄이지 못해 하마터면 사고가 날 뻔했다. 이때 이 남자의 행동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는가? 생명을 구하기 위해 한 행동이고, 결과적으로 모두가 무사하기 때문에 잘한 일인가? 아니면 신호를 지키지 않고 무고한 운전사를 놀라게 했으므로 잘못된 행동인가?
드림랜드와 남자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다양한 결론을 내릴 것이다. 이렇게 같은 상황에서도 다른 도덕적 판단이 가능하다면, 도덕 법칙이란 무엇인지 의문점이 생긴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도덕의 상대성’을 확인할 수 있는데, 도덕에는 절대적인 답이 정해져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를 주장한 대표적인 학자에는 니체가 있다. 베풀지 않는 것이 비도덕적이고, 베푸는 것이 도덕적이라는 생각은 과거에서부터 보편적으로 정해져 내려온 생각이지만, 니체는 이에 대해 상반된 의견을 제시했다. 도덕은 삶의 유용성 때문에 형성되고, 바로 그 유용성 때문에 상대적 성격을 띠게 된다고 말이다. 지금 현대 사회는 많이 바뀌었다. ‘정(情)’이라는 개념 자체가 점점 소멸되고, 더욱더 삭막하고 건조해지고 있다. 사람들 사이의 관계는 사무적이고 딱딱하게 변하고 있고, 공동체 주의보다 개인주의를 선호하는 부류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런 개인주의가 팽배한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과거 공동체 중심적이던 사회의 사람들에 비해 이러한 '상대성'을 더 환영할까?
정보산업이 급속도로 성장하면서 지구인들의 시공간적 거리는 더욱 좁혀지게 되었다. 다른 나라의 전통음식들을 언제든지 손쉽게 구해 먹을 수 있고, 지구 반대편에 사는 친구와 하루 종일 얼굴을 보며 화상통화가 가능하다. 심지어 코로나 19로 하늘길이 막힌 지금도, 다른 나라의 친구와 통화를 하며 안부를 물을 수 있다. 실제로 코로나 바이러스 전파 이후, 한국 학생들의 타문화권 사람들과의 소통에 대한 관심도가 늘어났다고 한다. 지금처럼 힘든 상황일지라도 ‘세계화’, ‘지구화’는 계속해서 적극적으로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이로 인해 우리는 더 다양하고 새로운 문화들을 자주 접하게 되었는데, 때때로 이것은 갈등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가장 쉬운 예로 들 수 있는 건, 초등학생 때부터 줄곧 배워오던 ‘다문화 가정’이라고 볼 수 있다. 흔한 ‘노총각의 동남아 아내 찾기’를 비롯해서, 최근 유튜브와 같은 인터넷 플랫폼으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국제 연애 스토리’도 있다. 또한 외국인들의 한국 문화체험 방송 등 타문화권 사람들을 상대로 한 방송과 각종 프로그램들도 늘어나고 있다. 이들의 이야기가 사람들에게 주목받는 이유는 아마도 ‘새로움’, ‘낯섦’의 작용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점점 세계화가 진행됨에 따라 다양한 문화들이 공존할 수밖에 없는 이 시점에서, 전통문화를 보존하고 이를 이용하여 사회를 한 걸음 더 발전시키는 것은 중요하다. 우리의 것, 너의 것들이 뚜렷하게 개성을 띄는 순간, 그리고 그것들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순간이 가장 다채롭게 빛날 것이라고 확신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는 분명 갈등 상황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얼마 전 나는 매년 전라북도 정읍에서 개최하는 ‘소싸움대회’의 소개글을 접한 적이 있다. 이 대회는 주기적으로 ‘전통문화이다’와 ‘소에 대한 동물학대이다’라는 엇갈린 반응이 나온다고 한다. 또한 이와 비슷한 사례로 키르기스스탄의 ‘납치혼’, 일명 ‘보쌈 문화’에 대해서도 윤리적인 기준을 두고 엇갈린 반응이 나오고 있다. ‘고유문화의 중요성’과 ‘윤리적 잣대’, 이 둘 중 어떤 것을 택해야 옳다고 볼 수 있을까.
도덕은 상대성을 띄고, 그로 인해 수많은 갈등 상황들이 발생한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하면 함께 살아가는 지구에서 도덕적 관점 차이를 좁히고 모두가 평화로워질 수 있을지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오늘날 현대 사회에서 나름 바쁘게 살아가고 있는 21살의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확실한 기준’과 ‘존중’만이 올바른 문화 공존의 사회를 만든다.”
이 지구와 사회를 완전히 이해하기에, 그리고 수많은 문화들을 배우기에 아직 너무나도 부족하고 어리숙한 인간이지만 오직 ‘확실한 기준’과 ‘존중’이 도덕적 상대성이 난무하는, 그래서 복잡하고 혼잡한 지구 사회를 더 나아지게 만들 것이라고 자신할 수 있다. 초등학교에서 학급을 운영할 때, 조별 활동의 개요를 짤 때, 회사를 창립하고 운영해나갈 때 가장 중요한 것은 확실한 ‘틀’이 잡혀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삐끗하거나 애매모호한 부분이 있다면 공든 탑은 쉽게 무너지기 마련이다. 즉, 지나치게 확실하고 꼼꼼한 체계가 곧 튼튼한 운영을 할 수 있게 만든다. 작은 학급, 모둠, 회사도 이러한 것들이 필수 요소인데, 하물며 지구는 어떨까. 더욱이 중요하게 작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전통문화와 윤리적 잣대의 충돌 상황에서, 아무리 고유의 전통과 색이 중요하다고 한들, 가장 우선시 되어야 하는 ‘생명’이 그로 인해 고통받고 있다면 그것을 떳떳하게 문화라고 칭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비윤리적인 문화 또한 그들에게는 ‘전통문화’ 일지도 모르겠으나, 그것을 ‘전통문화’라는 이유만으로 전 지구적으로 인정해주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의미이다. 더 나은 사회로, 더 나은 지구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진정으로 우선시 되어야 하는 것이 무엇일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으며, 그것을 명확하게 밝히고, 옳고 그름으로 판명 지어야 한다. ‘확실한 기준 명시’와 동시에 ‘존중’ 또한 함께 이루어져야 하는데, 이것은 ‘공존’을 위해 꼭 행해져야 하는 필수적인 항목이라고 생각한다. 셀 수 없이 다양한 문화가 존재하는 지구 상에서 서로의 문화를 이해하는 것은 단연코 중요하다. 마치 테트리스 게임을 하듯이, 마음 한구석에 공간을 만들어 알맞은 자리를 내어주는 것이다. 이때 게임을 이기는 것에 초점을 두는 것이 아닌 블록이 들어갈 자리를 ‘내어주는 것’이 중요하다. 관용의 자세를 통해 서로의 문화를 존중하고, 그로 인해 여러 문화권의 고유성과 특별함까지 지켜나간다면, 더할 나위 없는 지구사회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앞서 말한 ‘드림랜드’와 ‘페인빌리지’에 ‘확실한 기준’과 ‘존중’이 존재한다면, 사람들은 어느 쪽을 택할까? 이전의 사람들은 대부분 비윤리적인 고통을 감수하면서도 드림랜드에 가고 싶어 했다. 하지만 ‘확실한 기준 명시’를 위해 드림랜드의 비윤리적인 전통문화를 생명 존중적으로 변화시켜본다면, 혀의 일부분을 자르는 것이 아닌 머리카락의 일부분을 자른다던지, 자신을 상징하는 나무 인형의 혀를 대신 자르는 것으로 대체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일부분을 자른다’라는 문화의 고유성은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그 대상을 바꾸어 좀 더 나은 관습이 될 수 있게 한다. 또, 페인빌리지에 서로의 태도와 행동들을 이해하는 ‘존중’이 존재한다면, 싸움이 줄어들고 더 화목한 나라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확실한 기준’과 ‘존중’을 통해 드림랜드와 페인빌리지 간의 격차를 줄이고, 모두가 최소한의 고통을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할 수 있다.
이 ‘드림랜드’와 ‘페인빌리지’는 결코 가상 속의 나라가 아니다. 이 두 나라가 우리 집이 될 수도 있고 옆집이 될 수도 있으며, 우리 동네가 될 수도 있고 옆 동네가 될 수도 있다. 소수민족이 될 수도 있고 나라가 될 수도 있으며, 큰 대륙이 될 수도 있고 작은 대륙이 될 수도 있다. 고유의 문화 양상들을 유지하도록, 그래서 더 다채롭고 매력 있는 지구사회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되, 그 속에서 윤리적 가치를 잃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나는 현대 사회에게 질문을 던져보고 싶다. 당신의 드림랜드와 페인빌리지는 무엇인가? 그들을 윤리적인 틀 속에서 어떻게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가? 그것을 위해 당신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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