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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angmagazine May 04. 2021

우리는 <이방인>의 뫼르소를 비난할 수 있는가?_한완정

_5월호 <도덕의 상대성과 지구화>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을 보면 가슴을 후비는 첫 문장이 나온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모르겠다'


••• 죽음과 시간, 대중 앞에서도 도덕을 거스르는 인간 나부랭이. 이런 말이 떠오른다.

누군가 이런 내 글을 보고 당신 글은 너무 비관적이라며 욕할 수 있겠는가? 신만이 가진 영원을 한 끗발이라도 좇기 위해 우리가 정한 또는 신이 남긴 규율을 따라가려 애쓰며 한평생 신앙을 위로 삼아 살아가는 우리들. 나약한 인간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어떤 이는 인생, 허무주의로 몰아세우지 말라며 호통을 칠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건 내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건, 소설 《이방인》에서도 볼 수 있는 인간의 오만과 도덕적 모순에 관한 것이다. 주인공 뫼르소도 그러지 않는가. 어머님의 나이조차 알지 못하고 담배를 픽 피우는가 하면 연인과 코믹 영화를 보며 격렬한 사랑을 나누고 심지어는 살인죄로 법정에 서게 됐는데도 그저 무던한 모습으로 사람들을 마주한다. 그러곤 가장 중요한 '어머님의 죽음 앞에서의 태평했던 모습'에 대한 논란의 이야기에서도 뉘우치지 않는 태도를 보인다. 그저 모든 증오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본인의 욕구에 따라 바람에 따라 흘러가둣이 삶을 영위하는 이가 뫼르소인 것이다.



내가 처형되는 날 많은 구경꾼이 모여들어 증오의 함성으로 나를 맞아 주었으면 하는 것뿐이었다
알베르 까뮈 《이방인》


 뫼르소는 증오도 자유로이 타고 흘러 보내 줄 아는 이였다. 우린 그런 이를 보고 그저 비난만 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남을 위해 헌신한다 하여도 조금 더 깊이 생각하면 도덕적 딜레마에 빠져 고뇌하는 삶. 그런 삶을 사는 우리들은 뫼르소를 보고 마냥 비난만 할 수 있을까? 예를 들어 보자. 아주 쉬운 예시이다. <레 미제라블>의 장발장은 배고픈 가족들을 위해 빵 한 개를 훔치려다 잡혀 오랜 기간 감옥에서 지내게 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도덕적으로 잘못된 건 빵을 훔쳤다는 것이고, 같은 인간으로서 주목해야 할 점은 배고픈 가족을 위해 그랬다는 것이다. 이런 점을 살피지 않고 오로지 도둑질을 했다는 것만으로 우린 장발장을 비난할 수 있는가? 이렇게 여기서 우린 도덕의 상대성 이론을 발견할 수 있다. 애초에 도덕의 규율, 도덕이란 이런 것이다, 도덕적이려면 이렇게 행동하고 사고해야 한다는 말과 생각들도 모두 우리의 뿌리 깊은 지난 관습들과 오래된 조상들의 공동체 유지와 번성들을 위한 유용성으로부터 생겨난 것들이다. 태초에 선과 악에 대한 평가를 누가 어떻게 할 수 있었다는 말인가. 그저 생존과 공동체의 번성을 위해 또 그 번성이 국가 번영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도록 ‘도덕’이라는 수단을 만들어 규율을 지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변화의 과정에까지 영향을 미쳐 각 분야에 도덕적 성향과 규율이 합쳐져 윤리가 만들어졌다고 본다. 난 이것을 ‘도덕의 지구화’라 부를 것이다. 다른 말로는 ‘도덕의 사회화’라고도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오랜 기간 꾸준히 세습되어 왔고 생활화되어 왔기에 우린 장발장의 감옥 생활을 불쌍히 여기면서도 도둑질이라는 비윤리적인 이유로 그저 그렇게 넘기며 영화나 책을 편하게 볼 수 있던 것이다. 


필자는 독자들에게 가능한 한 질문을 던지고 싶다. 이론과 예시들은 얼마든지 구할 수 있다. 하지만 질문은 상대방에게 예기치 못하게 들을 때 더더욱 깊게 생각해 보게 된다. 여러분들에게 묻는다.

“추운 겨울, 떨고 있는 노숙자를 본 당신은 그의 앞에 놓인 깡통에 돈을 넣을 것인가 말 것인가?"


 글을 읽고 있는 독자는 어떻게 선택할 것인지 궁금하다. 분명 노숙자는 며칠을 아니, 일주일을 굶은 배를 움켜쥐고 있는 걸 수도 있고 옷도 제대로 걸치지 못해 옷 살 돈이 필요한 걸 수도 있다. 몇 푼의 돈이라면 따뜻한 찜질방으로 가서 개운하게 씻고 잠을 잘 수도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다르게 생각해 본다면 그 노숙자의 상황은 일을 하고 싶지 않아 경제적 풍요로움을 완전히 포기한 상황일 수 있다. 아무 대가 없이 돈을 준다는 것은 도덕적으로 그 사람에게 일의 필요성을 못 느끼게 하는 행위와 같다. 법률상으론 간단한 일이라도 시작해 보도록 일자리를 제공해 주는 것이 옳은 것이지 그저 돈 몇 푼을 주고 동정심을 보이는 것은 맞지 않다는 것이다. 당신의 선택이 무엇이든 난 현재 주관적인 도덕적 상대성을 가진 상태로 말을 하고 있기 때문에 어떠한 반박과 동의든 환영하는 바이다. 진정 중립적인 상태로 말할 수 있을까 나는 의문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지구화되어 왔고 도덕적인 면으로써도 태어날 때부터 또 글을 배울 때부터 이것은 맞고 저것은 잘못된 것이다라고 가르침 배워 왔기 때문에 마음속 깊이 박힌 건 도통 처음으로 돌리기 힘들다. 그렇기에 대다수의 사람들이 어머니의 나이와 죽음 앞에서 태평했던 자유로운 뫼르소를 도덕적이지 못하다고 비윤리적이라고 비판하고 손가락질하는 것이다. 나는 비판하거나 가만히 있어야 한다면, 굳이 그래야 한다면 가만히 있을 것이다. 온갖 질타를 받으며 사형당하는 뫼르소를 바라보게 된다면 나는 광장에서도 입을 다물고 등을 돌릴 것이다. 나의 도덕은 어머니의 죽음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잘못을 뉘우치지 않는 뫼르소의 잘못에 대한 비판도 있지만 그의 자유로운 사상과 어쩌면 삶과 죽음 앞에선 우린 모두 이방인이라는 그 신념이 가슴에 뒤섞여 있기에 그를 동정하지도 그렇다고 너무 비난하지도 않고 싶다. 최대한 도덕적 상대성을 내려놓고 도덕적 지구화의 과정들을 거슬러서 태초의 나로, 태초의 올바름으로 돌아가 그를 마주하다 등을 돌려 보고 싶다. 당신이라면 사형 직전의 뫼르소를 어떻게 바라보고 어떤 눈으로 살피고 어떻게 그에게 무슨 말을 할 것인지 고뇌해 봤으면 좋겠다. 


 그리고, 사형장에서 등을 돌리고 걸어갈 것이라고 말했던 뫼르소를 향한 나의 도덕성에 대해 귀하들은 어떤 태도와 어떤 생각으로 바라볼 것인지 궁금하다. 필자는 만약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뫼르소를 향해 손가락질하고 고함을 지른다면 그 역시 존중해 줄 것이다. 내가 배워 온 윤리대로라면 뫼르소의 부도덕함은 결코 동정받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보편적인 도덕에 의하면 살인죄와 친모의 죽음에 대한 무관심은 타인에게도 용서받기 어려운 점들이기에 나는 비인간적인 뫼르소 그의 죽음을 재촉하는 이들의 모습을 가만히 응시하다 사형장을 걸어 나갈 수 있다. 

즉, 이해와 존중은 할 수 있으되 나와 다른 도덕적 지구화를 겪은 그들을 향해 비난하지 않으리라. 이것이 나의 신념이자 지구화로 인해 나와 다른 도덕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향한 나의 태도이다. 


 도덕은 많은 분야 속 변화의 과정에서 여러 가지의 규율로 잡혀 공동체 사회 속에서 지켜야 할 윤리가 되었다. 어떤 공동체에선 문화적인 분야에서 도덕적 규율이 머리를 함부로 자르지 않는 것일 수 있고, 어떤 공동체에선 머리 길이를 함부로 상관하는 건 도덕적이지 못한 것이라 판단할 수 있다. 난 이런 현상을 글의 앞부분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도덕의 지구화, ‘도덕적 지구화’라 칭할 것이다. 독자들이 겪고 들은 일상 속 도덕적 지구화가 몹시 궁금하다. 꿈속에서나마 뫼르소, 독자들, 필자가 광장에 모여 어떤 행동들을 취할 것인지 상상해 보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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