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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angmagazine Apr 19. 2021

우리는 도화선에서 피어난 꽃이 되었다_김민주

_4월호 <university, agora>

대학생들은 사회에 대해서 완전히 모르지도, 그렇다고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도 않은 애매한 존재들이다.

사회의 다른 구성원들에 의해서 어떤 존재로 정의되는가,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어떤 존재로 정의하는가, 또 어떤 존재로 우리 스스로를 정의하고 싶은가? 무엇 하기를 기대받고, 또 무엇을 하고 싶어 하는가?




 어느 날 갑자기 부모님께서 가방에 빳빳한 책들을 가지런히 넣어 내게 건네셨다. ‘선생님 말씀 잘 들어라, 친구들과는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 공부 열심히 하고.’ 어렸을 때부터 들어온 말이지만, 뭔가 느낌이 다르다. 부모님의 말씀에는 예전과는 다른, 결연함 내지는 묘한 비장함이 묻어났다. 그렇게 정성 들여 세탁한 실내화를 한 손에 쥔 채, 유치원보다는 크고 아파트보다는 작은 건물에 들어섰다. 여러분들은 처음으로 ‘학교’라는 곳에 입성하던 때를 기억하는가? 추울 때는 따뜻한 곳에, 더울 때는 시원한 곳에 머무르고, 주체 못 할 에너지를 발산할 뜀 터가 있고, 입속에 단 것이 들어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었던 미숙한 인간이 본격적으로 지식과 지성을 익히고 사회인으로서 성장해 나아가는 시작의 단계이다. 얼핏 보면 단순한 생애 과제의 초기단계처럼 보일지라도, 이 ‘작은 시작’들이 모여 상승과 하강, 진보와 퇴보를 거듭하며 인간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거대한 사회를 만들게 된다. ‘작은 시작’은 비유하자면 흙 속에 씨앗을 심는 단계이다. 무엇으로 자랄지, 어떻게 자랄지는 예측할 수 없지만, 사회의 일원으로써 막 자리 잡는 단계이다. 앞으로의 전언은 인생에 대한 다소 진부한 비유이다.

 씨앗을 뚫고 나온 뿌리는 이내 세계를 지탱하고, 작은 새싹에서 점차 성장하여 길고 굵은 줄기를 뻗어내게 된다. 친구들과 함께 해가 질 때까지 놀이터에서 뛰놀고 나면 마냥 기분이 좋았던 작은 씨앗들은 점차 삶의 방향과 목표는 무엇인지, 삶을 살아내기 위해 필요한 지식들은 무엇인지를 배우게 된다. 자신들보다는 훨씬 키가 큰 식물들의 도움을 받으며, 무지와 미숙의 경험들을 양분 삼아 성장한다. 그렇게 씨앗은 자라고 자라, 제법 긴 줄기와 그럴싸한 꽃을 가진 성체로 성장한다. 다른 식물, 즉 다른 성인들의 도움이 없어도 혼자서 여생을 책임져야 하는, 막 성체가 된 그 식물은 ‘대학생’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이 사회에서 대학생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라는 고개를 넘어 이제 막 교복과 책가방을 벗어던지고 한껏 멋을 부린 사람들. 어깨가 빠질 듯 한 책가방 대신 옆구리에 노트북, 한 손에는 아메리카노를 들고 캠퍼스를 거니는 사람들. 한때는 금기이자 죄악이었던, 이제는 사회가 허락한 유흥을 즐기는 사람들. 누군가는 대학생을 한순간의 실수가 젊음의 패기가 될 수도, 젊음의 무리수가 될 수도 있는 시기를 살아가는 사람들로 볼 수 있겠다. 과거에는 당연하게 받아들여졌을 미숙함과 무지는 한순간에 나의 삶을 평가하는 하나의 기준이 된다. 그것이 어떤 미숙함이냐에 따라 나는 장래가 기대되는 청년이 될 수도, 장래가 걱정되는 청년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대학생’의 모습은 어떤가, 대학생인 나에게 자문해보면 그렇게 복잡한 형태는 아니다. 책상 위의 책이 교과서에서 전공서적으로 바뀌고, 강단에 서있는 사람이 선생님에서 교수님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부모님의 기대는 모범생에서 모범적인 사회인으로 바뀌었다. 단순히 높은 성적만 받으면 그만이었는데, 어느새 많은 사람들이 내게 학문의 부흥과, 사회의 발전과, 개인적인 능력을 요구하게 되었다. 덜 배운 것도 더 배운 것도 아닌 나는 그러한 요구들에 발맞춰 가끔은 놀고 가끔은 공부하는 그런 사람이 되었다. 생이 요구하는 과제에 발맞춰 왔기에, 자연스럽게 대학생이 된 것이다.

 그 속내가 어떠하든 우리는 겉보기에 제법 긴 줄기와 그럴싸한 꽃을 가졌다. 몸의 성장과 더불어, 사회가 우리를 바라보는 모습 또한 그러하다. 꽃봉오리 속에 대단한 열매를 가지고 있을 듯한 인재들, (다소 거창하게 표현하자면) 언젠가 더 성숙하게 되면 그것을 여과 없이 뽐내며 어엿한 성인이자 한 사람의 사회인으로서 황금기를 시작하게 될 사람들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앞서 언급했듯, 아직까지는 미숙과 무지가 젊음의 패기로 여겨질 수 있는, 새파랗게 젊은 식물들이다. 세상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좀 더 오랜 세월을 살아본 식물들은 우리에게 기대한다. 자신들의 업적을 이어받아 학문을 발전시키고 여전히 존재하는 사회적인 문제들을 해결해줄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우리보다 더 큰 거목들이 될 수도 있다. 겉모습은 성체지만 아직 수많은 가능성들을 품고 있기에, 그리고 ‘대학생’이라는 이름과 그들의 모습이 그런 기대와 낭만을 품고 있기에.

 우리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가? 다시 스스로 살펴보고, 자문해보자. 대학생이 아닌 또 다른 성체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지만, 사실 우리의 변태는 그렇게 복잡하고 대단한 과정을 거친 것이 아니다. 여전히 우리는 미완성이고, 불완전하며, 겉모습만 대략적으로 완성되었을 뿐 여전히 가끔은 놀고 가끔은 공부하는 초보 성인이다. 학문과 사회에 대한 책임감은커녕 자기 인생에 대한 막중한 책임감마저 체감하지 못하는 대학생들도 많다. 자랑하는 것은 아니지만 한때 나 또한 그랬다. 이름 옆에 붙은 학과는 ‘철학’이지만 철학의 발전에 기여하는 학자가 되겠다고 결심한 것도 아니며, 끊임없는 논쟁거리로 가득한 세상 속에서 살아가지만 그 논쟁들을 모조리 해결하겠다고 결심한 것도 아니다. 그나마 대학을 졸업하고 나아가고자 하는 진로나 직종의 방향성이 뚜렷하고, 그것을 향해 노력하고 있다면 충분히 인생에 대한 책임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사회는 그것 이상의 기여를 요구할뿐더러, 우리 스스로도 엄연히 세상의 영역 일부에 뿌리를 내리고 자리를 차지한 만큼 세상을 비옥하게 만들기 위해 무엇이라도 해야 할 것만 같다는 느낌을 받곤 한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히 세간의 희망사항을 넘어, 어떤 의무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태어났기에 그저 살아갈 뿐인 수많은 유기체들이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으며 자연의 질서와 균형을 유지하는 것처럼, 인간 또한 존재 자체만으로 더 나은 질서와 균형을 위해 진보해야 하는 어떤 섭리적 의무를 부여받은 것이다. 마치 우연에 의해 발생한 것 같은 일련의 진보들이 사실은 인간이기에 이루어낼 수 있는, 그리고 이루어내야만 하는 본능으로 우리 안에 머무른다.

 그것은 단순히 어떤 직감이나 느낌이 아닌, 억겁의 세월 속에 인류가 기록해온 역사와 그 사례들이 반증하는 어떤 객관적인 실체이다. 그 어떤 신적인 존재도 의도하지 않았고 요구하지 않았던 인류의 거대한 발전과 진보는 상승과 하강의 곡선을 거치며 축적되어왔다. 우리가 마땅하다고 여기는 사회적인 법률에서부터 당장 우리의 생활을 편리하게 만들어주는 온갖 것들은 그 축적 위에 세워진 산물들이며, 인간 그 이상 그 이하의 존재들이 아닌 인간 존재 그 자체가 만들어온 것들이다. 발전과 진보를 게을리하지 않는 것은 어떤 인격적 차원을 넘어 다른 고도의 이성을 가진 인간 존재의 유전학적 본능이자 영혼의 의지와도 같다.

 여기서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은 점은 학문을 발전시키고 사회 문제를 개선하는 것, 즉 우리가 머무르는 토지를 비옥하게 만드는 진보의 과정은 타의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세상 모든 위인들이 그러했듯, 행동의 원천이자 방아쇠가 되는 마음속의 작은 열망은 스스로 깨달은 필요와 스스로 불러일으킨 어떤 동기에 의해 깨어나는 것이다. 그 누구도 데카르트에게 의심하라고 명령한 적이 없으며, 그 누구도 마르크스에게 혁명하라고 한 적은 없다. 물론 그들의 행동이 그들을 둘러싼 삶의 환경과 접촉들에 영향을 전혀 받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학문의 발전과 사회 문제의 개선에 있어 결정적으로 기여하게 된 어떤 행동들은 그들의 내적인 동기와 자의에 의해 발생한 것이다. 그리고 내적 동기와 자의가 불러일으킬 작은 열망의 움직임과 새로운 행동의 국면은 그 누구보다도 막 성인이 되어 자유의지를 불태울 대학생의 시기에 가장 뜨겁게 즉발 되곤 한다.

 돌이켜 보면 우리는 참 단순한 삶을 살아왔다. 수면 시간을 제외하고 3분의 2를 책상에 앉아 있으며, 높은 성적, 좋은 대학에 가는 것이 인생의 최종적인 목표인 것 마냥 살아왔다. 하지만 막상 ‘대학생’이라는 타이틀을 목에 걸고 인생을 한 걸음 더 나아가 보니, 또 하나의 목표가 기다리고 있어야 할 새로운 땅은 망망대해, 허허벌판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내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느냐에 따라 개인적인 삶의 아주 작은 변화에서부터 세상의 거대한 변화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자신의 행동에 완전한 책임을 질 수 있는 진정한 성인(姓人)이 되기 위해 아주 조금씩 걸어가고 있을 뿐, 시야에는 다 들어오지 못하지만 지도상에는 분명히 존재하는 삶과 세상에 대한 혁신과 진보 가능성의 발판 위에 서있다. 아직 일깨우지 못한 본능, 당기지 못한 방아쇠, 그리고 촉발시키지 못한 도화선처럼 거대한 시작에 조금 앞서있을 뿐이다.

 물론 여기서 마치 세상을 움직일 만한 변혁처럼 거창하게 표현했던 ‘거대한 시작’은 100년이 지나도 이름을 남길만한 인간사의 업적들을 칭하는 것이 아니다. 삶의 개인적인 아주 작은 목표에서부터 세상을 변화시키겠다는 장대한 포부까지, 당장 나는 무얼 먹고살아야 하나와 같은 개인적인 고민에서부터 현 시국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에 대한 사회적 차원의 논의까지 모두 포함될 수 있다. 나의 사소한 행동들이 나비효과처럼 이 세상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그 범위는 매우 넓다.

 미숙한 성인, 초보 성인의 지위에서 머무르던 대학생인 우리가 행할 수 있는 것. 아주 작은 한 걸음일지라도 조금이나마 앞으로 나아갈 수 있고 나아가야만 하는, 섭리와도 같은 진보의 임무를 부여받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역할의 시작점은 ‘거대한 시작’의 도화선에 불을 붙일 만한 어떤 계기와 동기를 깨닫는 것이다. 그것은 결코 어렵지 않다. 만약 당신이 인터넷에서 ‘올바른 플라스틱 용기 재활용 방법’을 보게 되었다면 플라스틱 병을 사용한 뒤 라벨과 뚜껑을 제거하고 최대한 부피를 줄여 재활용하게 될 것이다. 또는 ‘환경보호를 위해 플라스틱 사용을 줄이는 방법’을 보게 되었다면 물병과 밀폐용기를 들고 다니며 일회용품 사용을 줄이도록 할 것이다. ‘플라스틱 쓰레기로 파괴되는 자연환경, 우리의 사회는 안전한가’라는 글을 보게 되었다면 어쩌면 당신은 환경보호 단체의 일원이 되어 기존 정책의 개선과 입법을 요청하는 실질적인 행동가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성인이라는 인생의 새로운 국면 앞에 서서, 어떤 과정을 통해 ‘거대한 시작’의 숙명과 과업을 이뤄나가야 하는지 고민하고 실천하는 것, 그리고 이를 위해 끊임없이 공부하고 경험하며 계기와 동기를 제공받는 것이 우리의 역할이다.

 그 어느 것도 해낼 수 있을 것만 같은, 누구보다 푸르른 꽃을 단 성체로 성장한 우리는 다름 아닌 도화선 위에 피어있다. 학창 시절을 거치며 우리의 줄기는 단순히 키만 커진 게 아니라, 어떻게 사고하고 어떻게 행동하는 성인이 될 것인지, 어떤 방식(이를테면 학문의 발전이나 사회 문제의 논의와 같은)을 통해 ‘진보의 숙명’을 이뤄낼 것인지를 고민할 수 있는 단단한 도화선으로 성장했다. 그것은 마침내 어떤 계기와 동기를 부여받았을 때 비로소 촉발하여 크고 작은 진보와 영향력의 모습으로 폭발할 수 있다. 도화선에 불을 붙이게 될 계기와 동기의 내용이 무엇일지 몰라도, 청년인 우리는 가슴에 저마다 도화선 하나씩을 품고 있다. 그저 조금 더 나은 성인(姓人)이 되고, 조금 더 이로운 세상을 만들겠다는 ‘거대한 시작’의 도화선이다.




6월호 <역사 고증 반영의 문제와 역사의식> 투고글을 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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