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위한 용서, 이해를 할 수 없다해도
좋아하는 가수의 신보가 나왔다. 나는 그 가수가 만들고 보여주는 것들 보단 그 가수 자체를 좋아하는 사람이니만큼 이번에도 역시 별다른 걸림돌 없이 즐겁게 결과물들을 소비했다. 음원 발매 전 팬들에게 무대를 미리 보여주는 '팬 그리팅'에 참여했고, 앵콜 무대로 보여준 마지막 트랙, 'Bless U'의 무대를 봤다. 앞서 짧게 설명하기로는 (연애감정의 의미뿐만 아니라) 열렬히 좋아하는 사람이 자신을 돌아봐주지 않아 원망스러울 때, 그런 미움에 잡아먹힌 후 결국은 나를 위해 용서하고 축복하며 돌아선다는 내용의 노래라고 했다.
나는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이 있다. 용서할 수 없는 사람? 어쩌면 용서하고 싶지 않은 사람, 애초에 미워한 적 없는 사람, 잊을 수 없는 사람에 가까울까. 끔찍했고 두려웠고 아직까지도 혹여 우연히 마주칠까 무섭지만, 그럼에도 가끔씩 꿈에 나온다. 그것도 그리운 모습으로. 이제는 내게 어떤 타격도 줄 수 없을 만큼 멀어진 사람이지만, 나는 그 사람을 종종 생각한다. 그 사람을, 보다는 그 사람에 대한 용서에 대해서.
내게 잘못한 이를 더 이상 질책하거나 벌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고 덮는 걸 용서라고 한다. 나는 지난 5년간 그 사람을 용서하기 위해 끊임없이 고군분투해왔다. 처음엔 어떤 판단도 할 수 없었기에 용서라는 말조차 떠올릴 수 없었고, 조금 지나서는 내게 일어난 일을 의심했기에 오히려 내가 잘못한 게 아닐까 생각했다. 용서라는 말을 처음 꺼낸 건 2년 반 전, 자살시도를 하며 남긴 유서에 그 사람에 대한 말을 써놨다. 용서는 못했다, 용서하고 잊는 건 애정이 없어야 가능한 일이다,라고. 그때 용서에 대해 말할 수 있었던 건 유서를 쓰기 직전 마지막으로 연락을 했기 때문이었다. 모든 일이 없었던 것처럼 대답했고, 기억은 안나지만 혹시나 상처 받았다면 미안하다, 너는 좋은 사람이기 때문에 더 이상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마무리했다. 나는 나를 더 의심하게 됐지만 미안하다는 말을 들은 덕분에 용서라는 말도 떠올릴 수 있게 됐다. 우울증 치료에 전념한 후 두 번째 입원이 끝날쯤 가족들은 법적 대응에 대한 말을 꺼냈다. 지인을 통해 연락처를 알아냈지만 연락을 할 수는 없어 가족들에게 맡겼다. 결국은 흐지부지 됐지만 직접 통화를 했던 언니가 했던 말은 기억이 난다. 걔 무섭더라. 미안은 하지만 잘못은 없다고 믿고 있더라. 그 뒤로도 나는 한참 용서에 대해 생각했다.
나는 한순간 내 존재가 그 사람의 인생에 오점이 됐을 것이라 자위했다. 그걸로 족해, 걔는 언제나 빤빤하게 완벽하게 살 애니까, 나 같은 애 한 번 만난 거 걔한테 큰 오점이 될 거야. 첫 입원 전 연락을 하면서 느꼈던 건 나는 그 사람한테 오점도 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포장해봐야 그 사람을 더욱 완벽하게 만들어줄 한 번의 방황에 불과하다고 느꼈다. 내가 하는 말이, 내가 쓰는 글들이 좋아서 친근하게 느꼈을 뿐이라고도 했다. 그래서 더 절망스러웠고 더욱 용서할 수 없었다. 끊임없이 용서하고 싶다는 갈망에 시달리면서도, 잊을 수도 용서할 수도 없어 괴로웠다. 용서는 하지만 잊지는 않고 싶었다.
용서를 시작하게 된 건 통화를 마친 언니가 그 사람을 두고 무섭다고 했던 말 중 하나 때문이었다. 나한테 묻더라고. 너랑 자기가 무슨 사이였는지는 아냐고. 나에게 했던 일이 연인 관계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음을 말하는 핑계였으니(당연히 연인관계에서도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지만) 언니는 그걸 무섭다고 말했겠지만, 나는 유치하고 저열한 사람이어서 그 말이 위안이 됐다. 적어도 나랑 만났다는 인지는 있었구나.
어쩌면 용서의 가장 큰 걸림돌은 정리되지 않은 감정이었을지 모른다. 나는 그 사람을 미워하고 원망해야한다는 걸 알면서도 그러지 못했다. 두려움에 떨며 일상생활에까지 지장을 받으면서도 미워할 수가 없었다. 오랫동안 길들여져서 그럴 수도 있었을테고, 내가 저자세를 자처해서 그랬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나는 미워하면서도 그리워했다. 애초에 온전히 미워하지 못해서 용서하지 못했다. 용서를 위해 노력했으나 도무지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사람이 나에대한 감정이 어느 정도 있긴 했다는 걸 알고 나서야 나는 받아들이고, 온전히 미워할 수 있게 됐다. 잊을 수 있었다.
더 이상 내 인생과 관련 없는 사람이니 신경 쓸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고, 가끔 꿈에 나오는 것 조차 의식적으로 잊으려고 했다. 영원히 지나지 않을 것 같은 시간이 지났고 나는 우울증 치료에 차도를 보이며 점점 그 감정과도 멀어져갔다. 용서에 대한 집착도 버렸다. 그 전까지 용서하고 싶었던 이유는 어쩌면 내가 그 사람에 대한 환상을 계속 가지고 싶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다. 몇 달 전 다시 그 사람이 나오는 꿈을 꿨다. 가지지 못했던 것을 다 이룬 꿈이었다. 충치를 뽑아내 듯, 불필요하게 가지고 있으면서 아파할 필요가 없다는 걸 알았다. 받아들였고, 잊었고, 용서했다.
나는 그 사람이 정말로 잘 살기를 빈다. 성공을 해라, 부자가 돼라 그런 말이 아니다. 그 사람은 나에게는 많은 상처를 줬지만 명명백백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딱 보통 사람만큼 잔인하고 끔찍했다. 그러니 나는 믿는다. 언젠가 나를 떠올리며 괴로워할 거라고. 나는 내 몫의 괴로움에 충실했으니 그 사람 역시도 그럴 거라고.
이 과정을 모두 알고 있는 친구들은 내 결론을 허탈해했다. 답답하게 여기기도 했다. 나는 용서를 하지 못하고 그 감정에 얽매이는 것이 괴롭고, 용서를 하면서 그 사람의 인격적 성장을 바라는 것이 가장 속시원한, 나를 위해 가장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친구들에게 말했다. 나는 이게 좋아. 나는 이게 내가 아프지 않을 수 있는 선택이야.
이제 그 사람은 나에게 어떤 상처도 줄 수 없고, 나 역시도 어떤 영향도 줄 수 없다. 다만 나로 하여금 더 나은 사람이 되길 바랄 뿐. 그럼에도 완전히 잊었느냐 말하면 아니다. 아직은 시간이 더 필요하다. 사실은 얼마 전에도 갑자기 떠올라 괴로워하기도 했고, 공소시효를 찾아보며 이 기간이 끝나길 기다리기로 결론내리기도 했다. (이 역시 주변인들은 답답해 했지만.. 공소시효 역시 내게는 족쇄처럼 느껴진다. 대응할 길이 있음에도 하지 않으며 괴로워한다는 죄책감이 들어, 이 기간이 빨리 끝나길 바라고 있다. 70일 정도 남았다.)
내가 좋아하는 가수는 곡을 소개하며, Bless U라는 곡은 원래 이번 앨범과 주제가 맞지 않아 넣지 않을 생각이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어쩌면 용서 역시 guilty pleasure 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넣었다고, 그렇게 말하는 걸 보고 나 역시 그에 동감했다. 용서를 한다는 건 어떤 대응과 복수를 모두 포기한다는 것이다. 나는 그게 나를 위한 일이 아닐까봐 죄책감을 느낀다. 하지만 그럼에도, 지금의 나는 용서할 수 있음이 기쁘고 온갖 미련과 그리움과 미움와 두려움에서 벗어난 것이 기쁘다. 나 역시 그 사람에게 Bless U 라고, 한 마디 하고 싶다. 축복이 있길. 정말 잘 살아서, 언젠가 죄책감 한 번 느낄 좋은 사람이 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