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다는 이미 나쁜 사람이었다는 걸 인정하기
나는 다년간 우울증을 앓아오며 스스로에 대한 어떤 확신도 갖지 못했다. 나를 정의할 수 있는 말들을 찾아 헤매면서도 그 어떤 것과도 맞지 않다는 게 괴로웠고,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있든 어색한 흉내만 내고 있다고 여겼다. 우울증이 나아가면서 나를 조금은 더 납작하게 생각할 수 있었고, 나를 정의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면서 오히려 내가 나로서 자연스러워질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나 스스로 나를 선한 사람이라고 여기고 있다는 걸 발견했다.
선한 사람, 까지는 아니더라도 나는 내가 악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믿었다. 적어도 의도적으로 다른 사람을 괴롭히지는 않을 사람, 타인의 고통에 도움은 주지 못하더라도 속상한 마음 한 번은 가질 사람, 그리고 그러지 못했던 시절을 부끄러워하는 사람이라고. 6년 전 오른팔에 'omnia vestra in caritate fiant'라는 문구를 새겼던 이유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사람을 대할 때 사랑으로 대하자,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는 없더라도 대할 때만큼은.
몇 달 전 SNS에서 새로운 친구들을 만났다. 비밀 계정으로 오랫동안 사용했던 터라 타임라인에 새로운 사람들의 이야기가 올라오는 건 오랜만이었다. 친구들을 통해 건너건너 아는 사이여서 새롭게 맺은 인연인데도 어쩐지 타임라인을 볼 때마다 불편해졌다. 그 사람들이 나쁘거나, 완전히 관심사에서 벗어난 말을 하거나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가 다른 건 아니었다. 그냥, 그냥 재미가 없었다. 재미가 없어서 내 SNS에서 보고 싶지 않았다.
평소 사람을 대할 때 재밌어하거나 웃겨하는 지점이 같은 사람을 선호하는 건 사실이었지만, 또 이렇게 대놓고 사람이 재미없어서 보고 싶지 않은 건 처음이었다. 그래서 친구에게 나 은근히 사람 가리는 것 같아, 털어놓았다. 친구는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몰랐어? 너 사람 있는대로 가리잖아. 모임 같은 데 가서 니가 보기에 재미없는 사람이 말 걸면 친절한 미소로 고객 응대하듯이 대답만 하잖아. 솔직히 충격받았다. 나도 어느 정도 내가 그렇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대놓고 옆에서 보일 정도였다고? 친구는 나는 너를 오래 봤고 그런 상황을 자주 봤으니까 아는거지, 하고 덧붙였지만 그러니까 니가 말하는 인류애니 뭐니 하는 것도 위선이잖아 이 새끼야, 한 마디를 더 했다. (이 새끼야라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운율을 맞추기 위해 넣었습니다…….) 반박의 여지없이 맞는 말이었다. 위선이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내가 생각했던 내 모습과는 달랐다는 점에서 적잖게 놀랐다.
얼마 전에는 싫어하는 사람의 소식을 들었다. 나는 살면서 싫어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어쩌면 앞서 말한 대로 있는 대로 사람을 가려서 조금이라도 불편한 사람은 접점을 만들지 않으려고 해서 그럴 수도 있고, 어쩔 수 없이 만나야 하는 사람이라면 싫어해봐야 나만 고통일 뿐이라 최대한 좋은 부분을 보려고 노력했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친구는 싫었다. 한창 활발하게 사람들을 만나고 다니던 시절에 알았고, 활동 영역이 겹쳐 생각지 못하게 접촉할 일이 많았다. 모든 걸 깔보는 듯한 태도도 싫었고, 나를 무시하는 듯한 태도까진 괜찮았지만 넉살을 가장해 내 주변 사람들에게까지 무례하게 구는 건 싫었다. 우연이었겠지만 스타일이 겹치는 것도 싫었고 내가 자주 하는 농담을 따라하는 것도 싫었다. 무엇보다 얼굴이 묘하게 닮아서 다른 사람들이 나와 그 친구를 함께 언급하는 게 정말 싫었다. 얄팍한 면을 감추기 위해 최대한 부리는 허세가 꼭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 더 싫었고, 어느 지점에서는 나와 비슷한 사고를 하고 있다는 것도 싫었다. 잠깐 연애를 했던 사람이 나를 만나기 전에 걔를 만났었다는 걸 취향 확실하네, 웃어넘길 정도로 싫은 면이 많았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기 위한 활동이 줄어들고 활동 영역도 달라지며 그 친구와의 접점 역시 줄어들었다. 가끔 큰 모임에서나 마주쳐 서로를 모르는 척하거나 어쩔 수 없이 친한 척 재미 없는 농담을 했지만, 근 3년 간은 얼굴 한 번 보지 않고 간간히 겹치는 지인을 통해 소식만 전해 들었다. 그리고 몇 주 전, 오랜만에 들은 근황은 처참했다. 건강 상태나 경제 상황이 무너진 것보다는, 사람 자체가 너무 망가져있었다. 이기심으로 다른 사람을 무너트리고 해를 끼쳤다고 했다. 우리가 입 모아 욕하던 끔찍한 인간군상의 표본이 됐다. 나는 그 얘기를 듣고 웃었다. 그 새끼가 결국에 그렇게 됐구나, 하고.
그리고 또다시 나 스스로에게 충격을 받았다. 결국은 나도 그런 사람, 싫어하는 사람 무너지는 꼴을 보고 웃는 사람이었다. 나는 적어도 내가 이런 상황을 접하면 피해자에 대한 안타까움을 먼저 느낄 거라고 믿었다. 그리고 그 친구가 그렇게까지 망가진 걸 안쓰럽게 여길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나는 웃었다. 남이 무너진 걸 보고 즉각적으로. 내가 믿었던 것처럼 나는 선한 사람, 인간에 대한 애정이 넘치는 사람이 아니었다. 당연하게도.
지금은 그 친구가 어떤 방법으로든 재기를 해서 다시 싫어할만한 대상이 될 수 있길 바라고 있지만, 일차적으로 내가 웃었다는 사실은 꽤나 충격이었기에 나는 이 일에 대해 수차례 생각했다. 이전에 깨달은 내가 사람을 가리고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결론은 간단했다. 나는 내가 생각하는 것만큼 선한 사람이 아니다. 그냥 보통 사람, 악한 만큼 악한 사람이다. 스스로가 실망스러운 건 사실이지만 인정하기 어렵지는 않았다.
자기혐오의 뒷면엔 자의식과잉이 있다는 말이 있다. 자기혐오는 결국 본인에 대한 기대치가 있기 때문에 생기는 거라고, 그런 기대치를 가지는 것 자체가 자의식 과잉이라고. 바꾸어 생각하자면 이 말은 '나는 왜 내가 정한 기준을 충족해야만 하는가'라는 질문으로 돌아온다. 나는 왜 내가 믿는 만큼 해야하는가? 나는 왜 내가 믿는 만큼 선해야하는가? 나는 왜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선하다고 믿는가? 왜 내가 인간 전반을 사랑하고 있다고 믿는가? 결국은 자의식 과잉이다. 아직까지도 나의 납작함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어 그렇다. 나는 나의 잔뜩 부풀어있는 자의식을 조금 누르고 인정했다. 나는 그렇게 선하지 않은 사람, 보통만큼 악한 사람이라고. 내 지향점에 선이 있는 건 맞지만 내가 이를 온전히 실천하고 체화한 사람은 아니라고. 그리고, 그게 뭐 어떻느냐고 되묻기로 했다. 내가 선한 사람이 아님을 인정한다고, 나쁜 사람임을 인정한다고 해서 내가 적극적으로 악을 실천하겠다는 것도 아니니까. 그냥 그런 사람임을 인정하는 것뿐이니까.
달라질 것은 없다. 나는 사랑을 실천하지 않으면서 입으로만 박애주의를 떠들 것이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만 사랑을 말하면서, 넓은 인류 집단에 대한 은근한 애정만을 가질 것이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미움은 나를 갉아먹고 괴롭게 하지만, 미워하지 않는다고 해서 사랑할 필요는 없다. 그래서 나는 적당히 이기적으로, 사랑할 사람들만 사랑하면서 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