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일본생활은 시작되었다.
도쿄시내까지 전철을 타고 한 정거장 가서 쾌속을 갈아타고 신주쿠역에서 야마노테선을 타고 동경일본어전문학교까지 갔다. 전철역에 내려서 학교까지는 걸어서 20분 정도 걸렸다.
학생은 중국학생이 3명 한국학생이 10명이었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막 온 학생이 대부분이었다. 사회생활하다 온 학생도 있었는데 그래도 20 초반의 학생이 대부분이었다. 나는 서른이 넘었고 결혼하고 왔기에 정말 특이한 케이스였다. 일본어공부는 재미있었다.
약간 통실하신 여자선생님은
항상 웃는 얼굴로 활기차게 가르쳐주며 칭찬도 많이 해주었다.
어느날은 팀을 나누어서 한자의 부수를 하나를 지정해주고 아는 한자 적기가 있었는데 우리 팀이 이겼다. 우리 팀에는 중국학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한자를 끊이 없이 쓰는데 정말 놀라웠다. 한자가 원래 중국에서 왔다는 것을 실감하게 했다.
그렇게 몇 번을 갈아 타면서 가는 학교는 몸이 힘들었다. 임신 초기이기도 하고 입덫도 있어서 전철에 서있는 거조차 힘들었다. 정말 빈자리가 그리웠다. 자리에 그냥 주저앉고 싶을 때가 많았다. 돌아오는 길에는 신주쿠 종점에서 차를 타는 것이어서 앉을 수 있어서 그나마 수월했다.
당시는 스마트폰이 없기도 했겠지만
전철에서는 책을 보는 사람이 많았다.
역시 일본은 책을 많이 읽는구나 했는데 옆에 앉아 있는 사람은 잡지를 보고 있었다. 슬쩍 옆으로 뭘 보나 보았는데 글쎄 도저히 펼치고 보기 어려운 내용이었다. 민망해서...
우리나라에서는 집에서도 숨기고 볼듯한 내용의 만화였다. 한번 더 문화충격을 받았다. 이것이 일본이구나 하고.
집으로 오기위해 전철을 갈아타는 신주쿠역에는 4개 정도의 노선이 통과한다.
4개 노선과 백화점이 두 개가 연결되어 있었던 거 같은데 그렇기 때문에 정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내가 집으로 오기 위해서는 게이오선을 타기 때문에 게이오백화점과 연결되어 있어서 백화점 식품매장에서 장을 보고 오기도 했다. 게이오선은 신주쿠와 하치오지를 오가는 전철이었다. 지하와 지상을 달리는 전철이었다. 모구사엔역까지 도착하면 집 가까이의 세븐일레븐에 가끔 들렀다. 한국에서는 하겐더스아이스크림이 없었던 거 같은데 그 아이스크림이 정말 맛있었다. 입덫을 가라앉히는 게 효과가 있었다.
집에 도착하면 저녁을 만들었다.
한국에서 가져온 된장으로 찌게를 제일 많이 만들었다. 한국에서 가져온 밑반찬 마른 오징어 무침, 장조림, 고추멸치볶음... 아 지금도 그리운 반찬이다. 내가 만든 것은 된장찌게와 계란말이 정도? 그렇게 혜택 받은 신혼생활을 보냈다.
남편은 하치오지에 있는 대학 내 언어코스를 다녔는데 혜택이 정말 많아 즐겁게 보냈다.
선후배 사이도 좋아서 쓰던 물건을 많게 받았던 기억이 난다.
고다츠(일본식 난방기구), 선풍기 등등...
나중에는 경차도 받아서 3년이상 탔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우리는 일본땅에서 꿈을 키우며 서로를 의지하면서 살았다. 남편은 조용하고 배려하는 성격이었기에 우리는 마찰이 없었다. 무슨 결정이든 함께 했고, 학교 생활도 집에 오면 함께 이야기를 나누어서 그 시간이 소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