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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이 Apr 11. 2023

과수원의 불청객

벽을 뚫고서 자라는 단단한 민들레를 본 적이 있을 거다. 샛노란 민들레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하얀색 씨앗으로 바뀌어 '후-'불면 바람을 타고 넘실넘실 날아간다. 어렸을 땐 그 하얀 민들레가 좋았다. 길에 핀 민들레를 죄다 꺾어 씨앗이 널리 널리 퍼지도록 아파트 앞 화단을 돌아다니며 골고루 날렸다. 생일날 촛불 끄듯 볼에 한가득 바람을 담아 열심히도 불었다. 하얀 날개를 단 민들레 씨앗이 어디까지 날아가는지 신나게 쫓아가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우리 엄마한테 뒤통수 씨게 맞았겠지 싶다.


부모님이 꾸린 800편 남짓의 과수원은 민들레밭이 되었다. 고작 3년째 과수를 가꾸는 중인데, 그 많은 민들레가 어디서 나타난 건지 모를 일이다. 작은 화살표들이 켜켜이 쌓인 이파리와 어린아이 머리처럼 비죽비죽 올라온 노오란 꽃잎을 보자니 썩 나쁘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20kg나 되는 비료포대를 땀 뻘뻘 흘려가며 나무 한그루마다 질질 끌어다 옮겼는데, 과일의 영양분이 아닌 민들레의 영양분이 되는 건 조금 속이 상한다. 과수원의 불청객인 셈이다.


그래서 조금 선선할 날씨에 민들레를 뽑기로 했다. 이파리만 있는 민들레는 어쩐지 굵은 뿌리 한 개가 쑤욱- 뽑혀버리는 느낌이다. 그런데 노란 꽃을 피운 민들레는 날이 갈수록 뿌리가 굵어지는데, 성인 손가락은 가히 능가할 정도의 두께다. 한 개가 뭐야, 어린아이 팔뚝만 한 뿌리도 있다. 그런 민들레들은 절대 안 뽑힌다. 인삼 뽑 듯 시원하게 뽑아 심봤다-를 외치고 싶지만, 그러다가 내 팔이 먼저 뽑힐성싶다.


인간은 머리를 쓰는 동물이라 했던가, 삽으로 파내면 그만이다. 삽을 푸욱- 땅에 꽂고는 발로 한번 더 깊이 박아준다. 그리고 지렛대의 원리를 이용해 삽의 손잡이를 꾹 바닥으로 내리누르면 민들레가 하늘로 솟구친다. 물론 대부분 뿌리는 두 동강이 나있다. 인삼의 단면을 보는 것만 같다. 남은 뿌리는 어쩔 수 없다. 죽던지 살던지 네 요량이다. 그런데 뽑힌 꽃은 그대로 땅 위에 두면 어떻게 그렇게 목숨이 끈질긴지 하얀 씨앗으로 변모한다. 뿌리가 없는데도 말이다! 그래서 꽃을 땅으로 처박아두던지, 한쪽으로 모아 포대기를 덮어두는 게 좋다. 안 그럼 열심히 뽑고도 번식할 테니 말이다.


처음 민들레를 뽑기 시작했을 땐, 민들레 효능도 익히 들었겠다, 뿌리를 모아 차를 끓어볼까 싶었다. 그런데 800평에 피어있는 민들레가 혹시 상상이 될까 모르겠다. 겨우 열 걸음 뽑았는데, 민들레뿌리는 진절머리 났다. 간간이 남성 팔뚝만 한 뿌리를 보고 경악했다. 깊게 박힌 뿌리를 조금이라도 뽑아보겠다고 엄지손가락으로 흙을 파내보았지만, 내 엄지만 아플 뿐이었다. 땅만 보고 삽질을 하는데, 숨이 턱턱 차오르는 건 물론, 선선한 바람에 땀을 식혀봐도 주룩주룩 흘렀다. 어쩐지 내 눈이 민들레 탐지기가 된 듯 눈앞에 노란색만 선명하게 보일 뿐이었다. 그놈의 민들레, 이렇게나 끈질길 줄이야.


몇 시간을 파냈는지 모르겠지만, 어느 정도 과수원에는 노란색 꽃 대신 노란 노을이 내려오고 있었다. 노란색 민들레 대신 피어난 분홍색 매화꽃이 산들이며 나를 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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