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비드 코모리: COVID-19와 히키코모리를 합친 합성어로, 코로나 시국으로 인해 반 강제적으로 집 밖을 나가지 않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과민성 회피 증후군
초 격리 생활 중 겪은 몇 가지 곤란함이 있다: 불면의 밤, 사회성 결여, 그리고 회피.
모든 곤란들은 곧 과도한 생각으로 이어졌다. 잠이 오지 않는 밤은 생각이 범람하기에 적당했고, 사람을 만나지 못할수록 증발되어가는 사회성은 우울함을 끌어들여올 좋은 구실이었다. 그중, 이 악순환이 만들어낸 회피라는 결과물은 나를 좀 더 깊은 굴 속으로 밀어 넣는 충실한 보초 역할을 맡고 있었다.
사람을 전혀 만나지 못하는 고립된 생활. 처음에는 평생을 가도 적응하지 못할 일일 줄 알았지만, 역시 적응의 귀재인 '인간' 답게, 나는 어느덧 연고 없는 시골 마을 생활에 점차 적응해 나가기 시작했다. 여전히 오 갈 곳은 없고, 불러주는 이도 부를 이도 남편뿐이었다.(하하♡) 지금은 벌써 시간이 조금 지났지만, 처음의 그 적응해 나가는 과정이 즐겁거나 자연스럽진 않았던 것을 기억한다. 그 적응은, 우울을 동반한 체념에 더 가까웠다.
사회라는 틀 안에서 온갖 타인들 사이에 끼어 있을 때에는 제 갈 길을 가는 것에만 집중하려 해도 시선을 빼앗거나 신경을 거스르는 일들이 부지기수로 일어나기 마련이었다. 늘 일정한 스트레스가 있었고, 헤쳐 나가야 할 일이 있었으며, 스스로의 마음을 적당한 선에 고정시켜 놓아야만 유지가 가능한 삶이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게 극단적으로 끊어지고 난 뒤에 알게 된 것은, 사실은 내가 그 스트레스와 압박에 상당 부분 기댄 채 살아왔을지도 모른다는 점이었다.
헤쳐나갈 것이 없는 삶은 어쩐지 무력했고, 발전할 구실이 없어 보이는 나 자신은 왠지 못나 보였다. 진취적인 생각을 해 보려 해도 그날그날의 최대 이슈는 '밥 뭐해 먹지'에서 크게 벗어날 수 없었다. (밥맛은 왜 안 떨어지죠?) 지나치게 넘쳐나는 여유 속에서는 오직 무의미한 자아 성찰만 계속 반복될 뿐이었다. 쇠가 녹슬어 가듯, 손 타지 않은 물건에 좀이 먹듯, 그렇게 서서히 고립에 물들어 가는 과정 중에 있던 어느 날, 나는 이전에 하지 않던 전혀 엉뚱한 생각을 하기에 이른다.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아."
과민한 회피의 시작이었다. 걸려오는 전화도 받고 싶지 않았고, SNS를 열어보고 싶지도 않았다. 누군가 나의 안부를 묻는 일이 곤란했으며, 모르는 사람에게라도 내 모습을 보이는 게 불편하게 느껴졌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난 그렇게 오래도록 멈춰있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나'의 상태에 머물러 있는 걸 전혀 받아들이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나를 공격하는 이가 전혀 없는 평화로운 상황 속에서도 나는 자발적으로 자신을 향해 판단의 채찍을 내리치고 있었다. 나는, '멈춰있는 나'와 대면할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았다.
요즘도 난 '낯선 나'와의 현란한 내적 사투를 벌이며 지낸다. 홀로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타고 이리저리 배회하고 있는 날 보며 남편은 여전히 하루에도 수십 번씩 물음표를 던지지만, 안타깝게도 내겐 이 요란 법석한 과정을 달리 설명할 만한 재주가 없다. 남편 스스로도 이런 내게 적응을 했는지 이제는 그러려니 하고 차라리 맛있는 음식을 입에 넣어주는 쪽을 택할 때가 많아졌다. 그리고 사실 그건 꽤 효과가 좋다. 세상이 끝날 것 같은 우울이라고 느끼지만, 입 안에 들어온 별미 한 조각에 금세 잊힐 가벼운 것이기도 하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난 또 그렇게 단순한 도움을 받아 동굴 밖으로 고개를 내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