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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춘 Oct 16. 2023

위험을 감수하는 연습

스타트업에서 일하기, 순간을 놓치지 마세요

10월 9일 한글날 휴일이 지나고 이제 내일이면 새로운 회사로 첫 출근을 합니다. 횟수를 셈하면 이제 다섯 번째 회사네요. 대학원을 졸업하고 직장에서 일을 하기 시작한 지 10년이 지났는데 돌이켜보면 각각의 회사들마다 서로 다른 색으로 일한 것 같습니다. 첫 직장이었던 대기업에서 나와 스타트업에서 일하고 이후 창업을 하고 다시 스타트업의 직원으로 일하게 된 여정을 관통하는 키워드를 꼽자면 “위험”입니다. 그리하여 오늘의 이야기는 커리어 경로의 분기점에서 왜 그런 결정을 했는지 ”위험“이라는 관점에서 회고해 보는 시간이 되겠습니다.


스타트업에서 일하기

대학원 졸업을 앞두고 취업 준비를 해야 하는데 게으르고 낙천적이었던 저는 아직 느긋하게 졸업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지도교수님의 권유가 있었습니다. “내 후배가 꾸리는 팀이 하나 있는데 면접 볼 생각이 있는가”였습니다. 저는 달리 바쁜 것도 없었고 취직을 하긴 해야 했으니 흔쾌히 면접을 보러 갔습니다. 면접을 보고 합격을 하여 일하기 시작했는데 가보니 저를 제외한 모든 팀원들이 해외 대학 출신이었습니다. 걸출한 학교들이었는데 스탠퍼드 박사/석사 출신이 가장 많았고 그때의 인연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번외의 이야기로 인맥을 이야기하면, 저는 사실 내향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에 인맥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습니다. 20대엔 인생의 큰 목표이자 숙제가 ”타인의 시선을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자연스럽게 살아가기 “ 였을 만큼이요. 그래서 도교-불교, 실존주의 등 제게 도움이 될만한 조각들을 취해 인간 개조를 하고 있었지요. 30대 중반이 지난 지금은 목표한 대로 자유롭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동안의 노력이 통한건지 그저 나이가 들어 뻔뻔해진 건지 구분하기는 어렵지만 말입니다. 어쨌든 저는 첫 직장도 그렇고 그 이후 이어진 회사들도 사람을 따라 움직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알진 못해도, 적어도 함께 일하며 가깝게 지낸 사람들에게는 좋은 동료가 되는 게 좋겠습니다. 마치 가족과 친지들이 사회 안전망으로 기능하는 것처럼, 직업적인 측면에서는 나를 인정해 주고 찾아주는 좋은 인연들이 안전망과 같습니다.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도록 뛰어난 분들을 모아둔 팀이었기 때문에 흥미로운 주제들을 다루며 일했는데 나중엔 팀이 사라졌습니다. 몇 가지 이유가 있겠는데 하나는 직접적인 사업적 성과를 염두에 두고 만든 부서는 아니었기 때문에 입지가 단단하지 않았고 다른 하나는 대부분의 팀원들이 병역의 일환으로 회사에서 일하고 있었던 점입니다. 병역의 의무가 끝나면 남아 있을 이유가 크게 있지 않았습니다. 실리콘밸리의 소프트웨어 대기업으로 가거나 하버드에서 박사 과정을 하는 등 팀원들은 자신의 길을 따라 떠났습니다. 팀원 중 한 분은 블록체인 분야의 스타트업을 창업했습니다. 2015년 즈음이었으니 그땐 스타트업이라는 용어보다는 벤처기업이라는 용어가 더 익숙한 시기였고 블록체인 역시 막 태동하던 시기였습니다.


그분은 제게 입사 제안을 했고 창업 초기의 팀이라 저는 첫 번째 직원으로 일하기로 했습니다. 이때 생각한 위험들은 두 가지가 있었는데, 하나는 피하려고 했던 위험이고 다른 하나는 이직하면서 취한 위험입니다. 팀이 사라지고 다른 부서에 흡수되어 일을 이어나가는데 소프트웨어 엔지니어에게 도움이 될만한 환경이 아니었습니다. 말로만 듣던 조직 내 정치도 존재하고 동료들 중에선 적극적으로 역량을 개발하는 사람들이 적었습니다. 승진만 바라면서 보신주의로 일하다가는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로서는 도태될 것이 분명했고 또 답답했던 점은 앞날이 너무 뚜렷하게 그려진다는 점이었습니다. 10년 20년 후의 모습이 그곳에 있었고 그건 제가 바라는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이런 위험을 피하기 위해 취한 다른 위험이 스타트업에서 일하는 것이었는데 당연하게도 그 당시엔 벤처기업은 위험하다는 인식이 많았고 요즘과 다르게 크게 성공한 스타트업들도 없어서 선호도 역시 낮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직을 한 이유는 같이 일하게 될 분의 실력을 믿었고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를 우선하는 철학 역시 맘에 들었기 때문입니다. 봉급은 줄어들고 생소한 스톡옵션을 받고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스타트업 생태계로 들어와 일하기 시작하고 3년 반이 지나 다시 다른 스타트업으로 이직을 했습니다. 산업 AI를 다루는 스타트업이었는데 제가 대학원 다닐 때 같은 연구실에 있던 선배가 창업한 회사였습니다. 나중에 창업을 하고 느낀 것이지만 아무것도 없는 스타트업에 초기 투자하는 벤처 캐피털의 경우, 팀의 구성원들을 유심히 봅니다. 저 역시 스타트업들로 이직할 때 창업자와 같이 일할 동료들을 중심으로 고민을 했습니다. 제가 다녔던 두 스타트업들도 창업자들의 실력이 뛰어났습니다. 어떤 사람을 깊게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는 그 사람이 이룬 학업적 직업적 성취를 지표로 삼을 수밖에 없는데 어쨌든 그 결과엔 한 사람의 열망과 노력이 투입되었기 때문입니다. 스타트업에서도 그런 열정, 좀 더 날 것의 표현으로는 욕심을 발휘할 것이라 예상한다면 회사가 성공하기 위해 분투하리라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스타트업으로 이직했을 때의 두 가지 위험은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피하려고 했던 위험은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로서 더 성장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제품을 시장에 내놓고 고객들이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대부분의 작업이 유지 보수에 치중되었습니다. 새롭게 시도하는 일은 적어지고 이미 알고 있는 지식을 활용해 고치는 것이 전부였지요.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일 수 있지만 아직 주니어 티를 벗어내지 못한 소프트웨어 엔지니어 입장에서는 성장에 목말라하는 것이 당연하고 그래야 했습니다. 그럼 어떤 위험을 취한 것일까요. 옮겨간 산업 AI 스타트업은 초기 투자도 받은 상태였고 B2B 분야를 하기 때문에 더 여유로운 일정으로 움직이는 것 같았습니다. 큰 위험은 없었지만 기회비용 입장에서 위험을 생각해 보면 사실 글로벌 소프트웨어 대기업에 지원하여 입사하는 것보다는 커리어 경로에 도움이 되지는 않았을 겁니다.


봉급생활자로 일하기

대기업-스타트업-스타트업의 순서로 일해오면서 인생에도 변화가 있었는데,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갖게 된 것입니다. 저는 장기적인 계획을 잘하지 않고 살고 있었는데, 그러다 보니 문득 지금 살고 있는 작고 볕이 잘 안 드는 집이 아이에게는 적합하지 않다고 느꼈습니다. (정확하게는 아내가 불만을 토로하며 저도 퍼뜩 알게 된 것이지요) 아내는 아내 나름대로 고민하며 부동산 청약 등을 알아보았는데 저는 그쪽으로는 생소하고 외벌이 하고 있는 제겐 직업적인 부분이 더 크게 느껴져서 봉급생활자의 삶에 대해 숙고하게 되었습니다. 스톡옵션 행사로 얻은 첫 직장 주식의 일부를 현금화해보기도 했고 당시 다니던 스타트업에서도 스톡옵션을 부여받은 것이 있긴 했지만 원하는 보금자리를 얻기에는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스타트업에서 7년 정도 일해보며 느낀 것은 생각보다 위험하지는 않다였습니다. 물론 그 사이에 스타트업에 대한 인식도 달라지고 성공한 스타트업들도 많이 나왔기 때문에 저뿐만 아니라 대중에게도 더 나은 인식이 심어졌을 테지요. 그러던 와중, 첫 직장에서 같이 일했던 동료 한분이 창업을 하셨고 제게도 함께 해보는 게 어떻냐는 제안을 했습니다. 그분은 대표, 저는 CTO로 말입니다. 봉급생활자로 주욱 일하며 나의 시간을 팔아 수입으로 바꾸고 기약 없이 내 집마련의 꿈을 꾸는 것이 창업하는 것보다 위험해 보였습니다. 그리하여 창업의 길로 들어서게 된 것입니다.


공동창업자로 일하기

창업을 한 회사에도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는데 제가 합류하여 본격적으로 시드 투자를 받고 여정을 시작하던 때엔 대표와 저, 이렇게 둘이서 어린이대공원 근처 창업보육센터의 작은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그동안 익혀온 것은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인프라를 구축하고 제품을 만들어내는 초기 스타트업의 업무였습니다. 평소에 다방면으로 기술 익히기를 좋아하고 여러 요소들이 복잡하게 결합되어 있는 시스템 다루기를 즐겼기 때문에 적성에 맞았습니다. 하지만 창업을 하더라도 대표는 못하겠다는 생각을 다시 했는데 함께 창업한 대표의 업무들을 어깨너머로 보면 제겐 어려워 보이고 재미없어 보이는 일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운이 좋게도 창업을 권한 대표 역시 능력이 뛰어난 분인데 글로벌 회계 컨설팅 회사에서 일하며 사업과 숫자에 대한 감각을 키워왔습니다. 대표는 제품 개발을 제외한 모든 업무를 담당했는데 투자를 위한 계약서 검토부터 시작하여 사무실 계약, 회계-인사 업무, 세금 처리 등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 투자 유치를 성공적으로 했습니다.


1년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3개의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구현했는데 결과적으로는 저는 중간에 하차하게 되었습니다. 업무적으로는 크게 어려울 것이 없었지만 가정과 일 사이의 균형을 잡는 것이 어려웠습니다. 아이를 가정보육하면서 키우는데 현재 아내의 체력으로는 버거운 부분이 있고 제가 스타트업에서 공동창업자로 바쁘게 일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아내의 철학으로는 돈을 추구하기보다는 가족과의 시간을 추구하는 게 중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외벌이 하는 입장에서 저 역시 언제까지 일할 수는 없고 스타트업의 성공으로 이른 자유를 얻게 되면 가족과 시간을 충분히 보낼 수 있을 것이라 얘기하며 설득해보기도 했지만 입장 차이를 좁히기는 어려웠습니다. 여기서 다시 위험을 마주했습니다. 계속 설득하며 이어나가 볼 수도 있었겠지만 점점 아내와 사이가 벌어지는 것이 보이고, 아이 앞에서 다투는 모습을 보여 아이가 울음을 터뜨리는 모습을 보니 다른 방향을 찾는 게 낫겠다 싶었습니다. 물론 아쉬움은 있습니다. 인생의 다른 시기였다면 어땠을까, 아이가 아프지 않았다면 일찍 잠드는 아이였다면 어땠을까, 견디기 쉬운 더 나은 보금자리에서 지내고 있었다면 어땠을까 등.


이 즈음 불교와 명상에 (다시) 관심을 갖고 책을 읽어보기 시작했습니다. ”이러이러해야 한다 “는 나의 고집, 아집 때문에 갈등과 불화가 생긴다고 생각하니 많은 것들이 새롭게 보였습니다. 아내의 생각도 일리가 있고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 직업관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예전에는 탄탄한 직장이 있어야 안심이다라고 생각했다면, 아니 적어도 정규직으로 어떤 회사에 속해 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면 이젠 필요하거나 상황이 바뀐다면 프리랜서도 해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고 또한 직장을 선택할 때도 너무 따지지 않고 인연에 따라 적당한 곳에서 일하면 되겠다는 생각입니다. 예전에 블라인드 커뮤니티의 글들을 봤을 때 자극적이고 흥미로운 글들이 많았는데 자칫 잘못하면 세상이 부과하고 있는 편협한 렌즈로 세상을 보게 되는 게 아닐까 무서워졌습니다. 이것도 하나의 위험이었습니다. 연봉이라는 숫자로 자신의 가치를 매기고 그 숫자를 조금이라도 올리기 위해 열을 올리는 것, 상급지 하급 지를 구분하며 부동산의 등급을 매기는 것 등. 물론 자본주의 세상에서 물질 없이 살 수는 없겠지만 모든 가치를 그것에 두는 건, 최상의 가치를 재화에 두는 건 위험하다고 느꼈습니다. 물론 불교에서 말하는, 집착이 고통을 부른다는 이야기의 영향이 있었겠지요.


진짜 위험, 순간을 놓치는 것

여름날의 일요일 아침, 딸아이를 자전거 뒷자리에 태우고 창동 우이천을 따라 산책을 하던 순간이었습니다. 시원하고 쾌적한 오전이었고 하늘도 햇볕도 모두 깨끗했습니다. 흐르는 물을 옆에 두고 제가 사랑하는 딸아이를 태우고 느긋하게 자전거를 타고 있자니 이게 행복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얼 손에 넣거나 성취해서 얻은 기쁨이 아니고 그저 온전히 현재를 알아차리는 것에서 오는 기쁨이었습니다. ”내가 틀릴 수 있습니다 “라는 책에서 현존과 아이에 대해 말하던 부분이 있었는데, 아이들이야 말로 현재에 집중하고 있는지 아닌지 기가 막히게 알아차린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저 역시 딸아이와 놀이를 하다 잠시 딴생각에 빠지면 금세 아이가 알아차리고 같이 놀자고 보채곤 했습니다. 딸과 놀고 있을 때 종종 업무나 다른 삶의 문제에 대해 생각할 때가 있는데 사실 무엇보다 큰 위험입니다. 다시는 경험할 수 없는 순간들을 놓쳐버리고 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이가 놀이를 하며 즐거워하는 표정이라던가 아빠를 바라보는 표정들은 현재에 집중하지 않으면 놓치고 마는 귀한 것들입니다. 인생을 살아가더라도, 과거의 일들을 떠올리거나 미래를 상상하며 보내는 시간으로 채워버리면 실제 세상을 경험하며 살아간 시간이 인생 전부는 아닐 겁니다.


위험을 다시 정의하기

아마 모두 다른 형태의 위험과 마주하며 살아가고 있을 겁니다. 제가 위험이라고 생각한 것들이 누군가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일, 혹은 기회라고 여겨질 수도 있겠지요. 그러므로 감히 여기서 무엇이 위험인지 어떤 위험을 피해야 하는지 취해야 하는지 말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 말할 수 있는 게 있다면 지금 내가 어떤 위험을 마주하고 있는지 파악하지 않는 것 자체는 여러모로 보아 위험 아니겠습니까. 위험의 형태는 자신이 처한 상황과 시기에 따라 다를 테니 각자 어떤 위험을 감수할지 고민해 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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