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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춘 Sep 26. 2023

Deep dive

감각 교란의 기억을 담은 SF 초단편

콘솔 화면의 커서는 미리엄의 심박과 같은 주기로 깜박이고 있었다. 시계를 흘긋 보니 오전 4시 20분을 막 지나고 있었고 가끔 기숙사 창밖으로 지나는 차량의 소리 그리고 헤드라이트 말고는 모두 고요 속에 잠겨 있었다. 미리엄은 이제 막 미주신경 인터페이스 설치 수술에서 회복한 참이었고 첫 다이브를 앞두고 기대와 걱정을 안은 채 화면 앞에 앉아 있었다. 장치 이름이자 가상세계의 이름인 "위어드"는 이제 인구의 절반 이상이 사용하고 있는 가상현실 시스템이다. 미주신경 인터페이스 수술은 손가락 끝에서 두뇌로 향하는 신경회로를 분화시킨 후 강화하는 수술이며 기존 신경망에 영향을 주지 않고 두뇌와 정보를 교환하는 전용선을 설치하는 셈이었다. 수술을 받은 사람은 손가락에 이식된 인터페이스로 "위어드"에 접속할 수 있다. 콘솔 화면의 빛은 미리엄의 얼굴을 비췄고 이내 결심에 찬 표정이 떠올랐다. 이윽고 미리엄은 접속 명령을 실행했고 주위의 다른 사물들처럼 고요 속으로 가라앉았다.

잠에서 깨듯 정신을 차린 미리엄은 갑작스레 쇄도해 오는 소음에 압도당했다. 눈앞엔 중화풍 요리가 놓여 있었는데 영어와 광둥어가 섞여 들려오는 걸 보니 배경은 홍콩인 듯했다. 사람들이 대화를 주고받는 소리, 식기와 나이프가 부딪히는 소리가 지나가고 미리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비로소 마주 앉은 사람의 얼굴을 인식하고 그의 입술이 움직이는 모양과 들려오는 목소리의 싱크가 맞아 들어갔다. 미리엄은 앞자리에 앉아 식사를 즐기고 있는 사람이 요제프임을 알아차렸다.

요제프는 미리엄이 활동하는 기계-예술 클럽의 구성원으로 전자음악 분야를 맡고 있다. 요제프의 프로그램을 통해 만들어진 음악들은 사람들보다는 기계들이 좋아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의 음악이 재생되는 도중 주변 기계들은 오작동을 하거나 정지하곤 했다. 미리엄은 기계들이 환호를 하거나 황홀경에 빠졌다고 강하게 확신했다. 요제프는 이번 작곡 프로그램에 어떤 데이터들이 입력으로 들어가고 어떤 알고리즘이 동원되었는지 설명하기 시작했는데 미리엄은 알 수 없는 이질감에 사로잡혔다. 사고의 속도가 현저히 느려지는 것 같았고 깜박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나는 기분이 들었다. 요제프의 말소리가 들려오면 잠에서 깨듯 정신을 차리고 직전에 나눈 이야기는 저만치 먼 시간 속에 잠긴 듯 아득했다. 이렇게 단기 기억에 문제가 생기자 미리엄은 걱정이 들었다. 제대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지, 자신이 놓쳐버린 부분은 없는지, 꺼낸 말들을 기억하지 못하는 건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설상가상으로 손의 감각도 둔해졌다. 젓가락질은 왠지 모르게 서툴렀고 젓가락으로 집은 음식을 떨어뜨리지 않게 애썼다. 미리엄은 눈앞에 놓인 요리를 무사히 다 먹고 자리에서 일어나 제대로 걸어 나갈 수 있을지 자신이 없어졌다.

요제프는 미리엄이 당황하는 모습을 알아차리곤 미소 지었다. 그는 처음 다이브 하는 사람들이 경험하는 신경 적응 멀미라며 미리엄을 안심시켰다. 식사값을 치르고 온 요제프는 미리엄을 숙소로 안내했다. 미리엄은 가상세계 속에서도 음식을 먹고 쉴 곳에 몸을 누인다는 게 다소 우스웠다. 그곳에선 텅 빈 위장을 달래는 대신, 피로한 근육을 달래는 대신, 감각 신호에 굶주린 신경을 달래는 것이다. 호텔방으로 향하는 사이, 미리엄에게 다시 멀미가 찾아왔다. 식당가를 지나는데 주변 인파의 목소리와 식당 창문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들이 뚜렷해졌다. 귀를 통과한 음파는 두개골 한가운데로 파고들었고 한껏 명료해졌다가 사라졌다. 미리엄이 고양된 감각에 한눈 판 사이, 그녀는 발걸음을 잠시 주춤거렸는데 새로운 이상감각을 발견했다. 미리엄은 인파를 향해, 인파를 피해 나아가는 자신의 신체가 서서히 사라지는 것 같았다. 몸이 점점 느껴지지 않았고 머리만 둥둥 떠다니는 기분을 느꼈다. 그녀는 손과 발과 몸이 잘 느껴지지 않아 지나가는 사람들과 부딪힐까 조심스러워졌다. 식당가를 지나 중앙의 트인 공간으로 나오니 카지노의 불빛이 알록달록했고 슬롯머신의 소리가 요란했다. 멀미의 증상이 그녀에게 한데 몰려왔다. 번쩍이는 색채는 평소보다 화려하고 선명했다. 미리엄의 시각과 청각은 더욱 예민해지고 주위를 보다 충실히 감각하는 가운데 그녀의 육체는 점점 희미해져 갔다. 이윽고 미리엄은 세상 속에서 사라진 기분을 느꼈다. 그녀는 어느 때보다 현실을 명료하게 느꼈고 그건 자신이 사라진 세계를 영화 보듯 관찰하는 것과 비슷했다. 기분 나쁜 멀미가 아니었다. 미리엄은 잠시 그 상태에 머무르며 색채와 소리와 인파들이 자신을 관통해 가도록 놓아두었다.

요제프와 미리엄은 호텔 로비를 지나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객실이 늘어선 통로를 한차례 지났지만 한번 더 엘리베이터를 타고 다른 건물로 이동해야 했다. 미리엄은 엘리베이터가 부쩍 느리게 움직인다고 느꼈다. 묵기로 한 방을 찾아 객실들을 지나쳐 가는데 마치 통로가 길게 늘여졌거나 시간이 더디 흐르는 것처럼 한참을 움직여도 쉽사리 거리가 줄지 않았다. 이번엔 요제프가 먼저 말을 꺼냈기에 그 역시 동일한 증상을 겪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미리엄의 신경교란이 가상현실 시스템에 국지적 소란을 일으켰는지 요제프에게도 멀미가 찾아온 것이다. 방에 도착한 미리엄은 침대에 누울 준비를 했는데 그건 로그아웃의 또 다른 표현이었다. 미리엄은 물을 한 모금 마시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는데 자꾸 시간이 늘어지는 것 같아 행동 하나하나를 완수하는데 한참이 걸렸다 - 혹은 그렇게 느꼈다. 마침내 미리엄은 침대에 누워 이불을 끌어당겼고 다시 고요 속으로 가라앉았다.

기숙사 방으로 돌아온 미리엄은 얼마간 멍하니 있었다. Wee(ir)d에 다녀오는 일은 꿈보다 강렬한 현실을 보여주기 때문에 초심자들은 혼란을 느낀다. 장자의 호접지몽과 비슷한 느낌일 것이다. 창문 밖으로 차 한 대가 지나가며 헤드라이트 불빛이 밝아졌다 사그라들었고 미리엄은 불과 30분밖에 지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콘솔 화면의 커서는 점점 희미해지다 사라졌고 진짜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한 미리엄의 숨소리 역시 들릴 듯 말 듯 잦아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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