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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닻 Apr 23. 2024

05. 멀미

|길을 물으려다 해방이 있는 쪽을 물었다|


기름으로 반질반질한 표면에

허옇게 굳은 설탕옷 입힌 도넛을

우유에 푹 적셔서 먹고 싶은데


무염 버터를 한참 녹여

퍽퍽한 통밀 베이글을 굽고

그 위에 아무 단맛도 나지 않는

무가당 크림치즈를 발라 먹는 게

의미가 있어?


모든 대화가 논쟁이 되던 무렵이었다

그렇게 물었던 너는

아니나 다를까 주둥이를 길게 빼고

에스프레소를 홀짝거리는 인물이었다


충동을 막는 건 도덕이나 논리가 아니야


하등 듣는 척도 않지만

말을 멈추면 네가 물을 것이었다

그러면?


공포지, 구체적인 공포


너는

급류처럼 차들이 하염없이 쏟아지는 도로를 향해

걸음을 내뻗는 사람 보듯 나를 보았다


오후 4시쯤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횡단보도 없는 차도를 건너가려고 기다리던

정수리를 맨손으로 으깨듯 짓누르는

따가운 햇발 아래서

단 세 걸음을 허락해주지 않는

그 맹렬한 무자비함을 견디는 일에 대하여


차라리 헛발질해

도로 위로 미끄러지고픈 충동을 막는 것은

그러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보다도 앞선 

장면이야,

발을 떼는 순간 머릿속에서 상영되고 마는

무서운 장면


공포를 믿어?

네 시선은 다시 나를 떠나 있고

그건 두통을 잊자고 허벅지를 때리는 발상이야

네가 내쪽으로 밀어둔 대답이

식어가는 베이글 옆에 곁들여져 있었다


믿기 전에, 믿어지는 걸 어쩌겠어


관자놀이가 매섭게 조여들던 기억만이 있다

대꾸한 말의 파동이 너에게 가 닿았는지

빵을 한입이라도 베어 물긴 했는지


끝내 결론 내지 못한 수많은 대화들이

미처 영화가 되지 못한 장면들이

지금쯤 다 어디로 갔는지


우리가 어디쯤인지도 모르는 지금

모든 서사는 다만 어지럽고


그러므로 더 이상 의미로운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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