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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이 Jan 02. 2024

식사 당번 정하기

초등 하나, 백수 둘. 셋이서 살고 있어요. 

퇴직한 남편과 함께 사는 아내들의 노고를 종종 듣게된다. 엄마 친구는 퇴직한 남편이 지방에 일자리를 얻어 주말부부 생활을 하게 됐는데 처음에는 적적하더니 이제는 주말에도 안 왔으면 좋겠다고 하신다. 이유는 집에 있으면 삼시세끼 밥을 차려주어야하기 때문이다. 아흔이 다 되어 가는 할머니는 손가락 하나 꼼짝하지 않으면서 밥 차려주기만을 기다리는 할아버지 때문에 홧병이 나셨다.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남일같지 않았다. 내가 전업주부가 된 이후로 남편은 집안일과는 완전히 담을 쌓고 지냈기 때문이다. 


세상이 바뀌어 기혼 여성의 60%가 일을 하고, 그만큼 남편도 가사에 참여하는 일이 자연스러워지는 세상이 되었지만 일을 하지 않는 40%에 속하는 전업주부는 여전히 남편에게 집안일을 맡기기 어려웠다. 퇴근하고 온 남편에게 설거지나 분리수거를 시키는 것이 미안하기도 하고, 집에서 놀고 있는 사람처럼 보일까 걱정되는 마음에 살림은 곧 내 몫이라고 생각했다. 하나 뿐인 아들이 우리를 보고 남녀의 성역할에 대해 고정관념이 생길까 걱정이 되었지만 그건 여자인 나만의 걱정이었고, 현실은 좀처럼 달라지지 않았다. 


그런 남편이 육아휴직을 냈다. 그동안 밖에서 일하고 왔다는 것을 면죄부로 집안 살림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던 남편. 이제는 그 면죄부도 사라졌고, 생활비도 줄여야 하니 외식, 배달부터 줄이려면 남편의 참여가 반드시 필요하다. 


"우리 이제 번갈아 가면서 식사를 준비하자. 아침할래? 점심할래?"


어떨결에 당번이 된 남편은 한참 레시피를 찾더니 콩나물국밥을 만들어보겠다며 의기양양하게 나섰다. 덕분에 결혼 9년 만에 처음으로 남편이 차려준 밥상을 받았다. 


솔직히 내 입맛에는 아쉬운 점이 없지 않았으나 남편의 사기를 떨어트리지 않으려 연신 엄지손가락을 세우며 한그릇을 뚝딱 비웠다. 본인이 만든 요리를 남이 맛있게 먹어주는 모습을 보며 소소한 행복을 느끼기를 바라는 마음도 조금은 있었고. 


여느 때라면 주말 점심은 무조건 외식이나 배달을 시켜먹던 우리는 남편의 육아휴직과 식사 당번 정하기로 연휴내내 모두 집밥을 만들어 먹었고, 덕분에 식비 지출 0원으로 생활비 방어에 성공했다. 


앞으로 남편의 요리 도전이 이어지기를 바라며. 

퇴직 후에도 자기 밥상은 자기가 알아서 챙겨먹을 수 있는 어른이 되기를 바라며. 


식사 당번제는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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