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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이 Jan 22. 2024

당신은 배알도 없어?!

"00씨가 내일 휴가라고 같이 산에 가자고 하네."

"그래? 다녀와. 그런데 우리 동네에 산이 있었어?"


동네에 산이 있다는 걸 이사온지 2년 만에 알게 되었다. 버스정류장 이름이 분명 00산이었는데도 산이 있을거란 생각을 왜 못했을까? 남편의 회사동료가 함께 산에 가자고 청하지 않았다면 산의 존재는 영영 모를 뻔했다. 이래서 집돌이 곁에는 나를 밖으로 끄집어 내주는 밖돌이 친구가 필수다.


활동적인 밖돌이 친구 덕분에 아침부터 땀을 빼고 돌아온 남편은 산이 적당히 높아서 아들이랑 같이 가도 좋겠더라며 다음주에 가기로 했단다. 드는 취미도 아니고 건강에도 좋으니 말릴 이유가 전혀 없다.  


그리고 다음주. 산에 가기로 한 남편이 현관에 서서 느릿느릿 신발을 신는 폼이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눈치다.


"그런데말야. 지난주에는 00씨가 휴직하고 돈도 못 버는데 밥은 자기가 사겠다고 해서 국밥을 얻어먹었거든. 오늘은......"


망설이는 남편에게 필요한 건 돈. 서랍을 열어보니 만원짜리 지폐와 오만원짜리 지폐가 나란히 보인다.


'두 명이니까 3만원이면 되겠지? 아닌가, 5만원으로 할까?'


아무리 수입이 없어도 누군가에게 국밥 한 그릇 대접할 능력도 되지 않는건 아니지만 그래도 우리 형편에 한끼에 5만원은 무리다싶어 3만원만 건넨다.


"오늘 밥은 당신이 사."


남편은 고맙다며 그제서야 가벼운 발걸음으로 나간다.

신사임당은 아까우니까. 세종대왕으로 합의봅시다!


우리 부부는 휴직을 결심하면서 각자 쓰던 용돈을 없애기로 했다. 어차피 용돈까지 챙길 수입도 없으니 필요하면 생활비에서 쓰기로 한거다. 물론 나는 그동안 이렇게 저렇게 남편 몰래 모아놓은 비상금이 있어 급할 때는 그 돈을 쓰면 되겠다 싶었지만 타고난 품성이 거짓말을 못하는 남편은 나 몰래 숨겨놓은 비상금이 한 푼도 없는 모양이다. 아니면 자기 비상금은 주식투자에 쏟고 나한테 돈을 달라고 하는건지도 모르고. 어쨌든 휴직을 적극적으로 권한 내 입장에서 돈 못 벌어온다고 남편을 홀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큰 맘 먹고 용돈을 줬다.


돌아온 남편에게 맛있는거 먹었냐고 물으니 편의점에서 컵라면에 삼각김밥을 먹었단다.


"왜? 3만원이면 두 사람 국밥 한 그릇 값은 되지 않아?"

"00씨가 돈도 벌면서 무슨 밥을 사냐고. 그러면 편의점에서 라면이나 먹고 가자길래."


순간 동료의 배려에 고마워해야 하는건지, 이 정도면 우리를 우습게 생각하는건지 헷갈린다. 그런데 확실한 건 자존심이 상했다는 것!


"자꾸 얻어먹지 말고 당신도 제대로 한 턱 내. 아무리 휴직이라고 밥 한번 살 돈도 없을까봐!"

"왜 발끈하고 그래. 솔직히 말해서 그 집 형편이 훨씬 나아. 거긴 형수 연봉이 형 보다 많을걸. 둘이 잘 버니까 그 정도는 얻어먹어도 괜찮아."


배알도 없는 남편.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잖아!


그런데 돌아서서 찬찬히 생각해보니 남편에게 3만원을 건넬까, 5만원을 건넬까 고민하다 3만원만 준 내 마음이나 국밥 대신 라면이나 사라는 동료 말에 선뜻 라면을 산 남편의 마음이나 다르지 않다는 걸 알겠다.


현실적으로 우리는 수입이 없는 외벌이 휴직자. 모아 놓은 돈을 조금씩 갉아먹으며 생활하는 백수들. 순간 기분 좋자고 1~2만원을 우습게 쓸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자존심따위 당분간은 개나 줘버려.


"남편 회사 동료 00씨. 고맙습니다. 우리가 복직하면 밥 한번 크게 쏠게요!"


언젠가는 지금 받은 배려를 갚을 날이 오겠지. 내가 어려울 때 받았던 배려를 잊지 않는다면 영 염치없는 사람은 아닐거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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