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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이 Mar 10. 2024

마흔, 쉼표가 필요해

 남편은 스물일곱이라는 남자치고는 어린 나이에 입사해 한번도 승진에 누락된 적이 없었다. 이과 출신치고는 드물게 높은 영어점수, 성실함을 무기로 한 높은 고가. 남편 말을 빌리자면 나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 주변에서 게으름을 피우니 자기는 저절로 승진하게 되었다고. 덕분에 마흔이라는 어린 나이에 어느새 차장 직함까지 달았고 은근 슬쩍 파트장이 되더니 어느덧 차기 팀장 후보로 언급되기 시작했다.   


 출근 시간은 8시 30분. 집에서 회사까지 거리는 15분. 그런데도 남편은 매일 아침 6시 50분에 일어났다. 샤워를 하고 아침 밥을 챙겨먹고 아이가 일어나면 겨우 눈인사만 나누고 집을 나섰다. 


"좀 더 느긋하게 나가도 되지 않아?"

"늦는 것 보다는 빨리 가는게 마음이 편해."


 남편의 대답에 더 이상 대꾸할 수 없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직장생활을 할 때까지 주기적으로 꾸는 꿈이 있었다. 약속시간에 늦는 꿈. 늦잠을 자고 일어나 서둘러 나갈 채비를 하지만 결국은 지각하는 꿈. 누구에게 쫓기는지도 모른 채 꿈에서도 헐레벌떡 조급한 마음을 감출 수 없던 꿈. 회사를 그만둔 후로는 더 이상 꾸지 않는 꿈. 프로이트에게 꿈 분석을 받아볼 필요도 없이 이 꿈은 내가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으며 살아왔는지를 잘 보여주는 꿈이다. 그런 끔찍한 꿈을 남편은 아직도 꾸고 있을지도 몰랐다. 


 블라인드라는 사이트가 있다. 사람들이 익명으로 자기 회사에 대한 리뷰를 올리는 곳이다. 남편 회사에 대한 평을 보면 '공무원. 워라밸이 확실한 회사.' 라는 평이 있다. 어느 정도 인정한다. 야근이나 주말근무가 없고 휴가도 자유로운 편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회사의 분위기가 그렇다는 뜻이다. 성실함을 유일한 무기로 직장생활을 하는 남편에게는 워라밸이라는 말이 무색했다. 동료들이 모두 칼퇴를 하는 가운데 혼자 남아 잡무를 처리했다. 때문에 상대적 박탈감은 더 심했다. 나 혼자만 아둥바둥 대는 것 같아 억울하다면서도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완벽히 처리하기 위해 애를 썼다. 공부를 할 때는 무엇이든 끝까지 해결하고야 말겠다는 과제집착력이 도움이 되었지만 이상하게 회사에서는 그 집념이 발목을 잡는다. 자꾸 내 일만 늘어나고 주변 사람들은 딩가딩가 놀면서 다니는 것처럼 보인다. 억울하고 답답한데 나마저 손을 놓으면 안될 것 같아 일에 더 매달렸다. 기진맥진해서 돌아 온 남편은 저녁 밥을 차려주면 허겁지겁 먹어치우고는 휴대폰에 빠졌다. 가끔은 자다말고 일어나 회사 메일을 뒤지기도 했다. 


 하루 종일 아이와 시간을 보내다보면 '성인 어른'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쯤 남편은 집으로 돌아왔다. 그럼 나는 하루 종일 아이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담임선생님이 뭐라고 했는지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공감받고 싶었다. 젓가락질을 하는 남편 옆에 앉아 쫑알쫑알 신나게 이야기를 하는데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내 말 듣고 있어?"

"솔직히 지금 아무 이야기도 듣고 싶지가 않아."


 에너지를 다 쏟고 집에 돌아 온 남편은 집에서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냥 누워서 휴대폰 게임이나 하고 싶은데 아이가 있으니 그럴 수는 없고 잠깐이라도 혼자 있고 싶다며 방으로 들어갔다. 힘이 조금 남아 있는 날이면 아이와 잠깐 놀아주기도 했는데 길어야 1시간 정도 놀고나면 하품을 하며 꾸벅꾸벅 졸았다. 이렇게 사는게 맞는건가 싶을 때도 있었지만 이렇게 살지 않으면 뭐 어떻게 살지 다른 길이 딱히 보이지 않았다. 


"남들도 다 그렇게 살아. 우리는 그래도 조건이 좋지. 부모님께 용돈을 드려야 하는 형편도 아니고, 아픈 가족이 있는 것도 아니고. 회사도 나쁘지는 않잖아."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하며 하루하루를 지냈지만 더 이상 어떤 말도 위로가 되지 않는 순간이 찾아왔다. 병원에 2박 3일 동안 누워 온갖 검사를 받고 난 후였다. 


 나쁘지 않다고 좋은 것은 아니다.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삶이 아니라 좋은 삶을 살아보고 싶다고 했다. 한창 아이를 키워야 하는 마당에 무책임하게 회사를 그만둘 수는 없고, 기왕이면 아이 대학등록금을 지원해주는 복지혜택을 누릴 때까지 버텨보고 싶다고. 그런데 이대로는 도저히 안될 것 같으니 1년만 쉬어 가자고. 


 당장 퇴사를 한다해도 놀랍지 않을 것 같은 상황에 1년만 쉬고 싶다고 하니 오히려 고마웠다. 박수치며 환영했다. 그러자고 아직 육아휴직이 남아있어 다행이라고 쉬자고 당신은 그럴 자격이 충분히 있다고. 그렇게 마음 먹는 것 만으로 출근하는 남편의 표정이 달라졌다. 퇴근 후 집으로 들어오는 발걸음에 생기가 생겼다. 모든 일은 마음먹기에 달렸다더니 쉬기로 결심한 것 만으로 이토록 사람이 여유로워질수가. 


 인생에 한번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빈둥거릴 수 있는 자유가 주어진다면 어떨까. 지금껏 한번도 내 의지대로 움직인 적이 없는 사람. 가난한 부모님은 공부를 잘 하는 것 만이 성공의 길이라 여기며 아들이 100점짜리 성적표를 받아올 때만 칭찬을 했고, 서울에 있는 대학에 들어가자 신이 나서 전화를 돌렸다. 취업난이라는 말에 겁이나 휴학은 꿈도 꾸지 못하고 타지에서 기숙사 생활을 해야 하는 점이 마음에 걸렸지만 불러주는 곳이 있음에 감사하며 직장에 들어갔다. 주변에서 하나 둘 결혼하기에 덩달아 결혼을 하고 얼떨결에 아들도 낳아 키우다 보니 벌써 마흔. 쉼없이 달려 온 사람에게 1년쯤 생각없이 먹고 노는 사람이 될 수 있는 시간도 필요한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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