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 이후 120년, 사람이 사람을 만나는 장소
주위를 둘러보면, 자연스럽게 외국인 친구들을, 연인을 사귀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1904년에는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그 때는 미프도, 틴더도, 야나두도 없었으니까.
이 글은 120년 넘게 내국인과 외국인을 이은 공간에 관한 글이다.
서울클럽은 중구 장충단로에 위치하고 있는 사교 클럽이다. 남산 기슭, 눈앞에는 국립극장과 3.1운동 기념탑이 있다.
바로 앞쪽에는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민평통)이 있다. 자동차를 타고 대로에서 조금 올라가다 보면, 작은 저택 혹은 클럽하우스처럼 보이는 건물이 있다.
모범택시 몇 대가 근처에 서 있다. 하지만 드나드는 사람들은 복장에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
다만 유의미하게 외국인의 비율이 높은 인상을 줄 뿐이다.
트레이닝복을 입은, 모델 같은 인상을 주는 청년에서부터
교회를 가는 것처럼 어두운 색의 좋은 옷을 차려입은 가족까지
내외국인이 편한 분위기로 건물 안에 드나드는 모습이 보인다.
이곳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다.
공식 홈페이지의 설명을 참고하면, 레스토랑ㆍ카페ㆍ바ㆍ수영장ㆍ피트니스센터ㆍ스쿼시코트ㆍ골프라운지ㆍ회의실ㆍ도서관 등이 내부에 고루 갖추어져 있다.
뷔페에서는 파스타와 스프, 간단한 샤퀴테리가 제공되고,
커피나 빵을 쉽사리 어디선가 먹을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을 준다.
인터넷상에서 서울클럽(Seoul Club)을 검색하면, 1904년부터 이어진 유서 깊은 사교 클럽이라는 말을 쉽게 볼 수 있다.
'고종 황제가 만들었다. 0.001%의 사교를 위한 공간이다. 정치인 누구, 연예인 누구가 다닌다. 가입비로 7500만원을 내야 한다.'
자극적인 기사의 표제마다 '그들만의 돈 잔치' 같은 느낌을 주는 단어들이 가득하지만 내부는 별달리 사람들을 밀어내는 느낌을 주지는 않는다.
청담의 어딘가, 압구정의 어딘가만큼 몸가짐에 조심하게 되기보다는 아무 생각 없이 어딘가 앉아서 바깥 풍경을 바라보고 있고 싶은 느낌을 준다.
1904년에 고종의 칙령에 따라 세워졌다는 것 외에는 서울클럽의 역사에 대해 제대로 정리된 자료를 찾아보기가 어렵다.
정확히 1904년이라는 수치가 어디서 온 걸까?
몇 개의 자료를 더 찾다 보면, 생각보다 서울클럽 자체의 결성은 더 이른 시기였음을 알 수 있다.
우리역사넷의 '정동구락부' 에 대한 설명을 참고하자.
http://contents.history.go.kr/front/tg/view.do?treeId=0202&levelId=tg_004_0870&ganada=&pageUnit=10
"정동에는 미국, 영국, 러시아 등 각국 공사관들을 비롯해 서양인들이 운영하던 음식점, 호텔과 선교사들의 주택 등이 밀집되어 있어 점차 사교와 외교 활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정동에 주재하던 외국인들은 1892년(고종 29) 6월 2일 서울 주재 외교관과 영사단(領事團) 클럽, 일명 서울 클럽(Seoul Club)을 결성했다."
그러니까 서울 클럽의 설립 자체는 1892년,
적어도 지금 언론에서 보도되는 것보다 10년 이상 일렀다는 것이다.
"조선 정치인들 역시 정동을 드나들며 각국 외교관들과 친분을 쌓는 한편 정치, 외교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되었다. 이들 가운데 특히 미국, 러시아와 가까웠던 정치인들을 중심으로 정동파(貞洞波)라는 하나의 정치 세력이 형성되었다. 정동파 인물들은 1894년 이전 고종(高宗, 재위 1863~1907)의 반청 자주 외교 정책에 부응하여 외교관이나 유학생으로 외국에서 체류했던 경력을 갖고 있었다. 즉 1888년 초대 주미 전권 공사와 수행원이었던 박정양, 이완용, 이채연, 이하영 등과 갑신정변에 연루되어 망명 또는 유학했던 서광범, 윤치호 등의 인사들이 정동파를 형성했다. 이들은 갑오개혁 당시 정동의 각국 외교관 및 선교사들의 후원을 받으며 정치적으로 세력을 확장하였다."
그리고 그곳에는 박정양. 이완용. 윤치호. 서광범.
한번쯤은 역사책에서 읽어봤을 법한 사람들이 드나들었다.
이들이 주로 모인 장소인 손탁 호텔(조선 최초의 근대식 호텔)이 정동에 위치해 있었기에,
서울 클럽의 일원인 외교관들, 그리고 이들과 어울리던 조선의 정치인들은
당시 정동구락부라는 이름으로 묶여서 불렸다.
이와 같이 외국인들이 만들어낸 사교 클럽, '외인구락부' 중에서도 상당한 존재감을 가지고
반일, 친미, 친러를 내세우며 정치 세력으로 부상한 정동구락부는
1898년을 전후, 아관파천 이후 서로 분열하고 대립하면서 그 위상이 소멸해 갔다.
아마도 1904년, 고종이 덕수궁 일부 공간을 서울 클럽에게 제공한 것은 그 이후일 것이다.
1904년이라면 러일전쟁이 발발하고, 대한제국이 한일 의정서에 서명하면서
일본의 영향력이 급격히 높아진 시기이다.
게다가 4월에는 덕수궁 내에서 의문의 화재가 발생하기도 했다.
대외적인 기사에는 '외국인과 내국인들의 문화 교류를 위한 목적'으로
고종이 서울클럽을 설립한 것처럼 나와 있지만,
목숨의 위협을 느낀 고종이 덕수궁 왕실 도서관인 중명전을 서울 클럽에게 제공한 것은
생각보다 그리 낭만적인 이유에서는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고종 이후 120년이 지났다.
그 사이 서울클럽은 덕수궁에서 벗어나, 역사의 질곡을 잔뜩 겪다가
1985년부터 장충동, 현재의 위치에 정착하게 된다.
아마 지금의 위치가 된 데에도 여러 이유들이 다채롭게 적용되었을 것이지만,
이 아티클에서 그 이유까지 깊이 들어가지는 않으려 한다.
많은 기사들에서 서울클럽을 설명하는 문장 중 이런 말이 있다. '오랜 전통이 있지만, 그만큼 화려하거나 세련된 맛을 주지는 않는다.'
별다른 저항감 없이 앉을 수 있는 것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이곳에서는 '지금 이런 공간을 누리는 당신은 선택된 사람이다.' 라고 말하는 듯한 공간이 적고,
그보다는 유럽이나 일본 어딘가의, 잘 다듬어진 오래된 컨퍼런스 센터 같은 인상을 주는 공간들이 더러 있다.
물론 이처럼 사교의 장소로서 기능하는 공간들은 필연적으로,
그 공간이 담아내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해 부응하는 측면이
존재할 수밖에 없고,
이곳도 그 문을 드나드는 사람들에게 자부심과 안락함을 가져다주기 위한 목적으로
설계되고 리디자인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들어오는 입구에 붙어 있는 노조 관련 현수막처럼,
공간을 유지하고 관리하는 과정에서 누군가가 소외되는 경우들도 있었을 것이다.
사람이 모이는 '클럽' 이라는 공간의 정체성이, 이곳에 존재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잠깐이라도 마음 편히 이야기하거나 쉬어갈 수 있는 장소를 제공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은 서울클럽이고,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곳이다.
여전히 '외국인과 내국인들의 문화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고,
이를 위해 이야기하고 앉아 있을 공간을 제공하는 장소다.
120년 전의 '클럽하우스' 도 아마 이런 곳이었으리라.
글: 김승현 / 프롭웨이브 대표
propwave.tistory.com
'좋은 공간과 좋은 사람이 있으면 살아갈 만하다' 라는 생각을 가진,
프롭웨이브라는 팀을 만들어 일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