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민기 Nov 24. 2023

문화에 관한 요즘 생각들

1. 아날로그 시대의 가치

책은 글만 읽을 수 있고, CD플레이어는 음악만 들을 수 있다. 종이, 팬, 연필 등은 그리거나 쓸 수만 있다. 미술관에서는 예술작품을, 영화관에서는 영화만 볼 수 있다.

아날로그 시대의 물건들은 당연하게도 한두 가지의 기능을 위해서만 존재했다.

문제는 디지털로 넘어오면서 하나의 기기가 다양한 것들을 편리하게 할 수 있게 되면서 발생하고 있다. 마치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듯, 쉽고 단순하며 자극적이고 재밌는 행위로 쏠리고 있다. 점점 긴 글은 읽지 못하고 짧은 영상만 소비되고 있다.

흥미롭게도, 도시공간에서도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주기 위해 무조건 규제를 풀게 되면, 오히려 공간의 주체들은 수익성을 추구하면서 다양성을 잃어버리고 단조로워지는 경향이 있다. 균형 있고 정교한 규제와 지침이 포함된 정책설계가 이루어질 때, 도시공간은 다양해지고 풍성해질 수 있다. 물론 모든 것을 규제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고 그곳으로 이끌어야 한다는 것이다.

디지털 시대에 지켜야 할 아날로그적이고 전통적인 방식과 가치가 분명 존재하기 때문이다.



2. 콘텐츠의 시대: 도시 전문가의 역할은?

상품을 사고파는 시대에서 서비스를 사고파는 시대로, 다시 콘텐츠를 사고파는 시대로 변화하고 있다. 예를 들어 스마트폰은 제조업으로 생산된 물리적 "상품/제품"이지만, 전화/문자/데이터 같은 무선통신 "서비스"를 공급받기 위한 도구이기도 하다.

하지만 스티브 잡스의 혁신적 디바이스인 아이폰 등장 이후, 실질적으로 대부분의 사용자들이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은 인스타나 유튜브에 "콘텐츠"를 직접 찍어서 공유하거나, 타인의 콘텐츠를 소비하는 행위이다. 다시 말해, 개인의 흥미와 행위와 경험이 합쳐져 콘텐츠가 되고, 다시 돈이 되는 세상이다.

앞으로는 가성비(cost-effectiveness)가 아닌, 편익 콘텐츠 비율(Benefit-Contents Ratio)이 중요해질 것이다. (기업이 일방적으로 제공하는) 서비스 상품보다 (플랫폼 기반의 상호 간) 디지털 콘텐츠 소비에 사용자들의 체류시간이 더욱 길어진다는 것은 그만큼 잠재적 시장가치의 확장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많은 전문가들이 콘텐츠 개발과 연결되는 개인의 창의성을 미래사회 생존에 가장 필요한 역량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도시 전문가들은 전문 컨설팅 서비스(자문, 설계, 계획 수립, 평가 등)를 제공하던 기존 역할을 넘어서서, 창의적 크리에이터로서 주민들과 소통 및 협업을 통해 공간 콘텐츠를 생산해 내는 역할로 확장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 증거로 최근의 많은 도시재생사업에서 시설 기반 서비스보단 주민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로컬 프로그램과 콘텐츠가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3. 문화 해석: 레트로 감성과 비효율의 가치 


요즘 후지와 리코 카메라의 가격 거품이 엄청나다. 인스타 시대에 감성적 결과물을 내준다는 소문이 돌면서 중고는 물론 신품까지 수요가 폭발했기 때문이다.


재밌는 점은 감성적 사진이란 게 결국 현실과 다른 색감의 독특한 이미지를 의미한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옛날 필름 카메라 색감에 회화적 구도가 결합된 형태다. 주로 도시답사 사진을 찍어온 나에게 현실과 다른 감성 카메라는 오히려 곤란하지만, 많은 이들이 현실과 다른 비현실에 열광한다.


하지만 긍정적인 현상은 보정을 통해 자신의 취향과 스타일을 구축해 가는 개성 있는 취미사진 인구가 늘고 있다는 점이다. 자신만의 표현 세계를 개척해 간다는 건, 곧 적극적인 문화예술 정체성의 형성을 뜻한다. 여전히 수백수천만 원의 대포 같은 카메라를 사서 고작 인물 배경을 날리는 아웃포커싱에 스스로 만족하는 이들도 꽤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문화현상은 그 기술발전 정도가 증가하더라도, 오히려 불편하고 손이 많이 가야지만 얻을 수 있는 행위나 물질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스마트폰의 카메라가 점점 발전해 나가고 있는 만큼, 그보다 훨씬 크고 무거우며 다루기 까다로운 미러리스 카메라의 관심이나 인기도 높아지는 경우가 그렇다. 심지어 옛날 필름 카메라를 구매하여, 인화의 비용과 번거로움을 잊혀진 가치의 회복으로 받아들이고 오히려 즐거워하는 사람들도 자주 보인다.


인스턴트 커피가 따라올 수 없는 커피원두 본래의 깊이가 있듯이, 오래된 방식이 가진 성숙된 문화의 맛이 있다. '레트로' 라는 문화 코드에는 단순히 옛날 디자인의 미학적 감성 뿐만이 아니라, 그리 편리하지 않은 행위에서 오는 느림의 미학과 전통적 가치 회복의 즐거움이 있는 것이다.


느리고 불편한 과정으로만 채울 수 있는 그 1%의 부족함 때문에 누군가는 99%의 비용과 시간을 지불한다. 그래서 사실 레트로 문화와 가성비는 서로 반대편에서 대치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레트로 같이 비효율을 통한 가치 추구는 돈이 있어야만 할 수 있는 고급문화활동이라는 말이다.



4. 세대를 관통하는 문화공간


공간으로 세대 간 갈등을 줄일 수 있을까?

내가 경험한 바로는, 영국에서 세대를 관통하는 문화가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할아버지/할머니, 아버지/어머니에 이어 자식들까지 맥주 한잔을 함께 마시는 동네 펍이다. 지역에 백 년이 넘은 펍은 그리 놀랍지 않을 정도로 많다. 크리스마스 시즌이 다가오면 동네 펍들은 예약을 받는다. 가족, 이웃, 친구들이 펍에 모여 조촐하게 파티를 즐긴다.


또 하나는 삼대가 함께 응원하는 지역 축구팀 경기장이다. 영국의 클럽축구는 19세기 중반부터 시작됐을 정도로, 산업화 및 도시화의 역사와 함께 한다. 그만큼 세대를 관통하여 지역이 하나가 되게 하는 힘이 클럽 축구에 있는 것이다.


세대가 함께 어울릴 수 있는 공간과 문화가 늘어나야 한다. 그래야 세대 간 갈등을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는 기회가 생겨난다. 세대 간 화합은 커뮤니티/로컬/지역으로 번져나가 더욱 끈끈한 지역사회의 힘이 될 수 있다.


작가의 이전글 일본 지방분권과 한국 메가시티 해석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