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가 본질을 앞선다고 주장하는 실존주의에 의하면, 동양의 성선설이나 성악설은 성립할 수 없다. 애초에 실존주의는 미리 결정되는 선천적 "인간성"이란 개념을 부정하고, 여러 갈래의 가능성을 내재하는 후천적 "주체성"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인간은 태어난 뒤에 개인의 주체적인 선택과 행동을 통해 정의된다는 것이다.
인간은 물건처럼 기능적 본질이 존재 이전에 미리 결정되지 않는다. 자동차는 이동수단이라는 본질이 미리 설계되고 생산이 이루어지지만, 인간은 존재(출생)를 먼저 하고 그 뒤에 개인의 인격이 성장과정에서 형성된다. 이 점에서 왜 현대사회(특히 푸코의 구조주의적 관점)에서 절대진리가 부정되고, 다양성과 포용성이 강조되는지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서구사회의 개인주의를 이해할 수 있다.
실존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생산적 기여를 목표로 하는 산업사회의 표준화된 교육은 인간의 주체성을 인정하지 않으며, 인간을 한정적이고 기능적으로만 바라본다. 이는 사회가 지향하는 본질(인간성)이 개인의 존재(주체성)를 앞서는 비인간적 교육방식이다. 최근 실존주의적 증거들이 온라인의 자기 계발 콘텐츠(e.g. 나 자신을 찾는 법, 자신을 바로 알기, 자신부터 사랑하기 등)에 넘쳐나고 있는 것도 우연은 아니다.
샤르트르의 실존주의는 구조주의 이전인 1940-50년대에 나온 철학 사조다. 비슷한 시기의 제인 제이콥스로 대표되는 현대 도시계획 패러다임의 변화는 이러한 실존주의적 관념과 완전히 분리될 수 없다. 현대 도시계획에서 기능(본질)보단 그곳을 살아가는 인간의 주체성(존재)이 발현하는 커뮤니티의 다양성에 주목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