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3학년 여름방학. 나는 친한 친구 한 명과 친한 언니 한 명, 셋이서 유럽 배낭여행을 준비했다. 가기 전에 여행 책자를 하나씩 사서 카페에 만나 일정을 짰다. 우리는 약 2주간의 일정으로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스위스, 독일 5개국을 하루 이틀씩 묵으면서 기차로 이동했다. 여자 두 명만 여행 가면 싸우면 문제 된다 하여 여자 셋이 여행을 결정한 것이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셋이서도 종종 기분이 상해서 잠깐 말 안 하던 시간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셋이 다녔기에 든든하기도 했고 부모님도 걱정을 덜 하셨던 것 같다.
여행 책자를 보며 공부하던 20대의 나.
셋이서 티격티격했지만 즐거웠던 유럽여행.
당시 나름 여행 책자를 열심히 보고 유럽을 갔다고 생각했는데 20년이 지난 지금. 다시 여행을 가려고 하니 생각나는 것이 없다. 강산이 두 번 바뀐 세월이 흘러 기억에서 잊혔는지, 아니면 아무 생각 없이 여행을 가서 기억에 없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내가 갔던 이탈리아에 20년 만에 가족과 함께 다시 찾는다는 것이다. 그 당시에만 해도 몇 백만 원이라는 경비를 들어갔을 유럽여행인데, 기억에 없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 그래서 더더욱 20년 만에 다시 찾는 유럽여행이니만큼 오래 기억에 남기고 싶다.
그리하여 마음먹은 것이 패키지가 아니라 자유여행을 선택했다. 누군가는 패키지로 가지 않고 자유 여행으로 가는 것에 대해 대담하다고 한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여행을 15일 정도 앞둔 지금, 패키지여행으로 하지 않은 것에 대해 엄청 후회 중이다. 자유여행을 가겠다고 마음먹은 후, 모든 여행 일정을 책임지는 것은 내가 되었다. 많은 나라를 다녀본 남편조차 유럽 여행은 처음이었고, 회사 다니느라 바쁜 나머지 여행에 대해 공부하는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뭘 알랴. 고작 다녀본 해외 여행지라고는 일본 후쿠오카, 태국, 필리핀 등의 휴양지뿐이었으니 말이다.
20년 전에 찍은 떼르미니역 표지판.
제일 먼저 비행기 표를 예약하고 그다음부터는 약 7일간의 일정을 짜는데 몰두했다. 요즘은 어디 가나 어플이 잘 되어 있어서인지, 애어비앤비도 번역 기능을 통해 쉽게 예약을 할 수 있었고 투어 어플을 통해 가이드 투어도 비교해 가면서 예약할 수 있었다. 예약하면서 놀라웠던 것은 금액이다. 예전에도 이렇게 비싼 입장료를 냈던가? 싶을 정도로 4인 가족 입장료만 20만은 금방 넘어 버렸다. 여기에 가이드 투어라도 붙이면 40만 원을 훌쩍 넘기기도 했다. 이탈리아를 살면서 나처럼 다시 갈 일은 있겠지만 한번 제대로 간 바티칸은 또 갈 일이 있을까? 싶어서 비싸더라도 투어를 예약했던 이유이다.
이탈리아 중에서도 추천받은 지역이 로마 말고 피렌체, 베네치아, 그리고 남부 등이 있었다. 남부투어는 가고 싶었지만 차나 기차로만 가야 하고 당일 투어도 알아보니 비용이 4인 가족이 100만 원이 훨씬 넘었다. 돈, 돈, 돈 하는 내 자신이 싫었지만 현실적인 문제 앞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 그렇다면 북부 중 한 도시만 가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고른 곳이 피렌체였다. 피렌체는 예전부터 너무 가고 싶었다. 아무래도 소설 <냉정과 열정 사이> 때문이기도 하고, 그림 공부를 하다 보니 우피치 미술관이 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아이들을 데리고 이동을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아무리 유럽여행을 다녀봤다고 해도 20년 전 일이라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뿐더러, 말도 통하지 않는 이탈리아에서 기차를 타는 것은 피하고 싶었다. 그러나 왠지 로마에만 있으면 조금 아쉬울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로마에서 피렌체로 가는 기차를 이딸로를 통해 예약하는 데 성공했다. 이 기차 또한 미리 예약을 하면 저렴한 자리가 있고 가까이 갈수록 비싼 자리만 남는다 하여 미리 예약을 해 두었다. 그리고 바로 저렴한 피렌체 내 호텔을 찾아 1박만 예약을 했다. 여전히 기차를 타는 것은 겁이 난다. 과연 내가 플랫폼을 잘 찾아서 제 시간 내에 탈 수 있을지. 그것도 혼자면 모를까 딸린 식구들까지 줄줄이 잘 챙겨서 갈 수 있을지 여전히 미지수이다. 하지만 이 경험 또한 나중에 하길 잘했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아이들도 기억에 오래 남겠지? 나 또한 이렇게 어렵게 간 피렌체가 더 크게 감동으로 다가오겠지? 라며 스스로를 위로해 본다.
피렌체를 생각하며 그림을 그리다.
그렇게 굵직굵직한 일정을 짜고 나니 어느덧 로마 여행까지 1달이 남았다. 이제부터는 짐을 싸기 시작했다. 가장 많은 도움을 받은 것이 유럽 여행 관련 네이버 카페이다. 나는 매일 같이 들어가 정보를 얻었다. 4인 가족이 유럽 여행 갈 때 가져가면 좋은 짐과 관련된 글을 집중적으로 찾으면서 짐을 싸는데 도움을 받고 있다. 그 외에 현지 로마의 상황도 큰 도움이 되었다. 가장 큰 걱정이 소매치기인데, 소매치기를 당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자세하게 적어놓은 글은 숙지하고 또 숙지했다. 또다시 20년 전의 유럽 여행이 떠올랐다. 나는 그때 짐을 어떻게 쌌더라? 사실 기억이 잘 나지 않았지만, 그때에도 소매치기를 조심해야 한다고 가방을 앞으로 메는 일이 많았던 것 같다. 그리고 트렁크에는 햇반과 라면, 튜브 고추장이 있었다. 아마 짐 싸는 것은 비슷하지 않았을까? 아, 바뀐 것이 있다면 스마트폰이다. 당시에는 스마트폰이 없어서 나는 디지털카메라를 가져갔다. 아마 그때만 해도 디카가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때인 것 같다. 스마트폰 대신 여행 책자와 지도를 들고 다녔다. 그리고 가끔 한국에 있는 부모님께 전화를 드리기 위해 공중전화를 이용했던 것 같다.
어쩌면 20년 전의 로마와 지금의 로마는 그다지 바뀐 것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어차피 로마는 여전히 중세 시대 정도에 멈춰있다. 그 옛날 모습을 최대한 훼손하지 않고 늘 복구만 하고 있으니 말이다. 최대한 건드리지 않고 그때 그 시절의 로마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으니 말이다. 유독 뜨거웠던 로마의 햇빛은 여전한 것 같다. 그렇게 더워도 아이스커피를 마시지 않고 뜨거운 에스프레소를 마시던 이탈리아인들. 거리는 예전 그대로 돌바닥이라 걷는데 불편하고 가게에는 대부분 에어컨이 없어서 너무 더웠던 기억이 있다. 지금 로마를 다녀온 사람들의 후기를 보면 변한 것은 없어 보였다. 아마 다시 로마를 대하는 내 마음만 바뀐 것은 아닐까. 나는 어느새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두려운 마음 한가득 안고 다시 로마를 찾는다. 20년 전의 나는 두려움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겁 없던 녀석(?)이었다.
20년 만에 다시 찾는 로마라니, 너무 낭만적이에요~
누군가가 한 이 말을 들으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래, 제삼자가 보기에는 나의 여행이 낭만적으로 보일 수 있구나. 그런데 정작 나는 가족을 데리고 ‘잘’ 다녀와야 한다는 마음 때문에 즐기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다시 마음을 비워냈다. 그리고 오롯이 ‘나‘에 집중하기로 했다. 비록 기억나지 않는 20년 전 유럽여행이지만, 그 기억을 더듬어 다시 로마를 만날 준비를 해야겠다. 20년 전의 여행을 기억하지 못하는 일을 두 번 다시 반복하지 않기 위해 나는 매일 글을 쓸 생각이다. 아이들과 함께 하기에 그림을 온전히 그리는 시간은 많지 않겠지만 그때그때 나의 생각을 공책에 글로 메모해 둘 시간 정도는 있을 거라 믿는다. 나의 기분, 나의 감정, 내가 본 로마 등을 한 공책에 잘 담아 오고 싶다. 이제는 엄청나게 큰 트렁크에 짐을 쌀 차례이다. 최소한의 것만 싸고 나머지는 현지에서 조달한다는 조금 가벼운 마음으로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