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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희 Jul 12. 2023

IMF와 코로나가 남긴 것

IMF에 대한 편지, 유희

  2020년 겨울을 기억합니다. 온갖 괴담과 함께 코로나라는 전염병이 전 세계를 공포로 뒤덮었지요. TV를 켜면 온통 코로나 이야기였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전염병으로 제대로 된 외출도 하기 힘들었습니다. 아이들은 학교와 보육시설 대신 집에 있어야 했고, 어른들은 재택근무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저는 막 다섯 살이 된 저의 아이와 온종일 집에서 있었습니다. 코로나에 걸리면 인생이 끝나기라도 할 것처럼 아이와 긴 시간을 15평 좁은 집에서 지냈습니다. 아이는 영문도 모른 채 놀이터를 금지당했고, 집 앞 슈퍼에 갈 때도 마스크를 써야 했고요.

 

  그런데 이런 기억도 마스크 해제와 동시에 함께 사그라드는 기분입니다. 왜 그렇게 집에만 있었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별 거 아닌 일이 된 것도 같고요. 다 시간이 지났기 때문에 가능한 일일 겁니다.

 하지만 그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 속에 있었는지 생각하게 됩니다. 집에서 아이를 양육하는 일 정도는 힘든 축에도 끼지 못할 만큼 고통받은 사람들이 많았지요. TV를 켜면 두렵고 우울한 희망 없는 뉴스뿐이었습니다. 자영업자들은 빚을 내어 장사를 이어가고, 의료진들은 사력을 다해 환자들을 돌보았으며, 많은 아이들이 제대로 된 돌봄을 받지 못했습니다.

 

  저는 그때의 상황이 우리나라 외환위기 때와 비슷하다고 느껴져 매일이 슬펐습니다. '어찌할 수 없음'의 상태가 매일 반복되고 있었으니까요. TV 화면 속 드러나지 않은 이면에선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몰라 두려운 마음이었습니다. 개인의 노력과는 별개로 닥친 재난은 개개인을 특히 약자를 더 힘들게 한다는 사실이 무척 괴롭더군요.


  1997년, 한국의 IMF 때도 드러나지 않은 이면에 어두운 현실을 마주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강원도에서도 아주 작은 시골 마을에 있었던 어린아이도 IMF를 비켜가지 못했으니까요. 외환위기를 뉴스가 아닌 현실로 마주했을 때 저는 초등학교 6학년이었습니다. 6학년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담임 선생님이 제 이름을 호명했고, 손에 학용품 세트를 쥐어 주셨습니다. 가져본 것 중 제일 값비싼 학용품이었는데 그때는 그 학용품을 받았다는 것이 좋아서 IMF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저의 삶에 어떤 영향을 줄지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 무렵, 아버지는 다니던 시멘트 회사에서 해고를 당하고 집에만 계시기 시작했습니다. 그 학용품이 아버지가 집에 계셨기 때문에 받은 것이라고 생각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고요. 

  회색 시멘트 가루가 묻은 회사 외투를 입고 출근하던 아빠가 일을 그만두고, 이전에도 좋지 않던 집안 분위기는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로 안 좋아졌습니다. TV를 켜면 불안했고, 아빠와 엄마의 표정은 점점 더 어둡게 변하기만 했습니다. 아빠는 그 뒤로 변변한 일자리를 찾지 못했고 지칠 대로 지친 엄마는 집에 머물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중학교 때는 학교에서 나오는 점심 급식이 하루 끼니의 전부였던 적이 많았습니다. 굷지 않기 위해 학교를 가고 허겁지겁 급식을 먹었습니다. 그나마 제가 이렇게 살아있는 건 이때의 급식 덕분인 것 같습니다. 

 ‘IMF만 없었더라면…….’

  이 시기를 힘들게 지나고 삶에 많은 불행을 겪은 이들이라면 한 번은 해보았을 생각일 겁니다. 저도 무수히 생각해 봤고 원망했던 것 같습니다. 다행히 지금은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 있지만  IMF의 후유증은 고스란히 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가족이 완전히 사라졌으니까요.


  코로나 확진자가 줄고 일상을 차츰 회복하고 있는 듯 보입니다. 하지만 어디선가 누군가는 저처럼 그 후유증에 비명을 지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코로나 후유증으로 우울감을 느끼는 사람이 많다고 하고요. 아마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처한 이들은 수없이 많을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 일어난 일이니 수습하며 앞을 향해 나아가자고 하는 게 얼마나 기운 빠지는 말인지 생각해 보게 됩니다. 가족이 해체되는 경험을, 개인의 삶이 무기력하게 망가지는 것을 바라만 보아야만 하는 상황 속에서 무엇을 수습하고 미래를 꿈꿀 수 있을까요? 진흙탕 속에서 뒹굴고 있는 사람에게 “힘내!”라고 말하는 것과 뭐가 다를까요? 


  며칠 전, 집 앞 슈퍼에 다녀오다 길에서 죽은 작은 새를 보았습니다. 죽은 지 며칠 된 새의 몸은 햇볕 아래에서 부패되어있더군요. 노란색의 깃털을 가진 새 같았는데 새는 점점 회색빛으로 변해가고 있었습니다. 어떤 종류의 새인지 들여다보고 싶었지만 부패되고 있는 새를 들여다볼 자신이 없어 시선을 오래 두지는 못했습니다.

  불행도 부패된 새의 몸과 마찬가지로 아무도 들여다보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뉴스에서 많은 이들이 눈물을 흘리며 고통을 호소하지만 그 화면이 지나가면 우리는 또 다른 뉴스를 보고 그 장면을 잊어버리지요. 누구도 불행에 처한 타인의 삶 속에 깊이, 너무 깊이 들어가는 걸 원하지 않습니다. 개인의 몫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IMF도 지나고 코로나도 이제 먼 단어가 되어갑니다. 하지만 많은 상인들이 은행에 빚을 지고, 경기 악화로 인해 가정이 파탄 나고, 아이들이 방치되거나 죽었습니다. 이 후유증을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 편지를 이경 씨에게 쓰면서 기도합니다. 부디 많은 사람들이 고통받지 않기를, 고통받더라도 빨리 회복할 수 있기를, 다치거나 죽지 않게 해달라고 간절하게 빌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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