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리듬으로 사는 법
반보 빨랐더니 병원행, 반보 늦추니 삶이 보입니다.
어떤 영화나 공연이 인기를 끌까? 대중과 얼마나 가까워야 할까? 너무 앞서 가면 외면당하고, 너무 뒤처지면 식상하다. 그래서 흔히 ‘반보 앞서 가기’를 권한다. 한 발자국이 아니라, 반보. 살짝 앞서가는 감각, 라디오 PD 시절 내가 배운 답이다.
“청취자가 듣고 싶어 하는 음악, 들으면 행복해질 음악을 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지만 인기곡만 틀어선 안 됩니다. 음악 PD는 반걸음 정도 시대를 앞서 가야 합니다. 그래야 보석 같은 음악을 발견해 들려줄 수 있습니다.”
CBS FM 음악 PD 심영보가 말하는 선곡하는 자세다.(라디오레시피 23, 282p)
적당한 거리에서 시대를 바라보는 감각, 그것은 방송뿐 아니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도 통한다. 너무 앞서 가면 멀게 느껴지고, 너무 뒤에 있으면 보이지 않는다. 살짝 앞선 자리에 선 사람, 그 사람이 뚜렷이 다가온다.
나는 계절에도 반보 앞서가기를 즐겼다. 봄이 오기 전, 얇은 재킷을 걸치고 찬 바람 속에서 일부러 거닐었다. 서늘한 기운 속에서 남들보다 봄을 서둘러 맞고 싶었다. 초겨울에는 미리 두꺼운 옷을 꺼내 입고 푸근함에 안겼다. 문화생활도 마찬가지였다. 화제가 되기 전의 영화, 알려지기 전의 TV드라마에 먼저 빠져들었다. 생활 속에서도 늘 ‘약간 앞서가기’를 해보려 했다.
그 '앞서가기'가 내 삶을 뒤흔들어 놓았다. 사우회보 편집장으로서 더 생생한 기사를 써보겠다고 충남 논산까지 취재를 갔다가 낙상사고를 당했다. 몸이 마음의 속도를 따라주지 못한 순간이었다.
입원 42일 만에 퇴원했지만 걸음은 여전히 어색했다. 비틀거리는 걸음을 양손으로 잡은 등산 스틱에 기댔다. 내 마음은 빠르게 걸을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이번에는 몸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반보 늦추기’를 고른 것이다.
우리는 ‘무한질주 시대’를 살아간다. 사업은 속도전이라고 하고, 앞서지 않으면 죽는다고들 한다. 하지만 모든 일에서 모두가 선두가 될 수 없다. 되어야 할 필요도 없다. 조금 늦게 가면서, 앞서간 이들이 닦아놓은 길로 안전하게 갈 수 있다. 앞선 이들이 흘린 이삭을 줍기도 한다.
봄이 오기 전 봄옷을 입는 것도 좋지만, 겨울이 지난 뒤 겨울옷을 입고 봄길을 걷는 것도 괜찮다. 산뜻함은 덜할지 몰라도 포근함은 있다. 앞서가며 보지 못한 것들을, 뒤에서야 볼 수 있다. 앞모습은 가릴 수 있어도, 뒷모습은 감추기 어려우니까.
속도는 취향이다. 누군가는 오토바이를 타고, 누군가는 자전거를 탄다. 김치도 그렇다. 겉절이를 좋아하는 이가 있고, 곰삭은 묵은지를 찾는 이도 있다. 계절은 안 그런가. 한여름을 즐기는 이도 있지만, 한겨울을 만끽하는 이도 있다. 앞서가는 삶은 앞서서 멋지고, 느리게 걷는 삶은 여유 있어서 좋다.
꽃향기는 살짝 부는 바람이라야 번진다.
반보 앞서가면 얻는 것이 있고,
반보 늦추어도 얻는 것이 있다.
나는 내 걸음으로 남은 길을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