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 표현의 원리
“라디오 오디오 제작 수업에서 제작 방법을 배우면, 이를 응용하여 텔레비전과 같은 다른 미디어에서의 표현 방법을 익히는 데에 도움아 됩니다.” 인하대학교 <라디오 오디오제작> 수업 오리엔테이션에서 단골로 하는 말입니다. 모든 미디어콘텐츠는 제작자와 수용자의 커뮤니케이션을 고려해서 만들어집니다. 제작자는 독자나 청취자, 시청자가 관심을 끌만한 주제를 고르고, 그들의 흥미를 어떻게 지속적으로 끌고 나가며, 의도한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느냐 고민하게 됩니다. 미디어의 특성을 살려 표현하는 점은 다르지만 표현 원리는 같다고 볼 수 있지요. 그래서 라디오오디오 제작에서 기본을 다지면, 다른 미디어 제작에 힘이 되고, 더 나아가 다른 예술의 창작에도 도움이 됩니다.
그림에서도 라디오의 표현방법을 찾을 수가 있습니다. 제가 눈여겨보는 회화 작품 중 하나인 폴 세잔 Paul Cézanne의 ‘사과와 오렌지가 있는 정물’입니다. 저는 강의 시간에 이 그림에서 배울 수 있는 라디오의 표현 방법을 찾아보라고 말하곤 합니다. 이 작품은 고호 나 클림트의 작품처럼 우리나라에서 인기를 끌지 못하지만, 미술사에서는 의미 있습니다. 먼저, 그림의 독특한 점을 살펴보시죠. 여러분이 짐작하다시피, 여러 개의 사과가 저마다 다른 모양입니다. 사과의 형태와 색도 다르고 놓인 위치도 다릅니다. 언뜻 보면 모든 사과가 비슷해 보일 수 있지만, 자세히 보면 이 세상의 모든 사과는 그 모습이 조금이라도 서로 다릅니다. 게다가 놓여있는 위치나 햇빛이 비추는 각도에 따라서 그늘도 지고 햇빛에 빛나니 더 다르게 보입니다.
사람도 그렇습니다. 지구상의 모든 인간은 다 다릅니다. 비슷해 보이는 사람도 자세히 보면 다른 점이 있습니다. 사람의 목소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비슷하게 들릴 수는 있어도 제각기 다릅니다.
라디오는 오디오 매체입니다. 소리 만으로 전달합니다. 여러 명이 출연하는 경우에는 당연히 서로 다른 목소리를 찾아 캐스팅해야 합니다. 세잔의 사과 그림처럼 다름을 강조할 필요가 있습니다. 목소리가 쉽게 구별되는 사람으로 출연자를 찾아야 합니다. 음색이나 느낌이 비슷하면, 그 소리가 그 소리 같아서 청취자가 구별해 듣기가 힘듭니다.
보통 사람들을 대상으로 인터뷰해서 만드는 복스팝 vox pop(시민의 소리, 플래시컷)의 제작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여섯일곱 명의 짧은 목소리를 편집해서 구성하는데, 소리가 엇비슷하게 들리면, 구별이 힘들고 변화가 적지요. 복스팝 만들기에서는 세잔의 사과 그림을 떠올리면 도움이 됩니다. 사람마다 목소리가 다르고 상황에 따라 더 달라진다는 점을 분명히 인식하고, 그것을 표현해야 합니다. 제가 편집한 <라디오 오디오제작> 교재 표지화에 세잔의 사과그림을 넣은 이유입니다.
그림을 통해서 배우는 라디오 표현 방법에는 ‘대비’contrast 도 있습니다. 촛불을 그릴 때에, 촛불을 아무리 밝은 색으로 칠해도 주변이 밝으면 환해지지 않지요. 바탕을 어둡게 칠해야 촛불이 밝게 보입니다. 슬픈 이야기를 전할 때는 슬픈 이야기 만을 전해서는 슬퍼지지 않습니다. 전체를 환한 색을 칠했다고 그림이 환해지지 않지요. 어둠이 있어야 환해집니다. 마찬가지로, 밝은 이야기가 있어야 슬픈 이야기가 돋보여집니다.
제가 장애인을 주인공으로 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만들 때는 원칙이 있습니다. 청취자들이 장애인 프로그램은 칙칙하다는 선입견을 갖습니다. 듣지 않으려고 합니다. 슬픈 이야기, 고통스러운 이야기는 절제하고, 밝은 이야기나 재미난 장면, 행복한 모습을 최대한 많이 넣어줍니다. 밝게 나가다가 적절한 시점에서 고통스러운 장면이나 슬픈 이야기를 담아내지요. 행복에 대비되어, 슬픔이 강조됩니다. 청취자는 웃다가 가슴이 먹먹해질 것입니다.
제가 2007년에 만든 라디오 다큐멘터리 “유정이의 작은 도전, 립싱크는 싫어요’는 그런 원칙으로 구성했습니다. 선천적 장애를 갖고 태어난 초등학교 6학년 유정이는 신체적으로 장애가 있고, 지적 발달도 늦어서 어려움을 겪습니다. MBC 창작 동요제 20주년을 맞아 특별공연으로 ‘천명의 합창’을 하게 되는데, 유정이는 학교 친구들과 함께 천명의 합창단에 참여하게 됩니다. 아무리 노래훈련을 해도 나아지지 않자, 짓궂은 오빠가 “미꾸라지 한 마리가 물을 흐린다."면서, 립싱크를 하라고 권합니다. 유정이는 립싱크는 싫다면 제 목소리로 노래하겠다고 우깁니다. 그 과정에 슬픈 이야기가 담깁니다. 즐거운 분위기와 장애인의 아픔을 대비시켰습니다. 이 작품을 구성한 작가 ‘김신욱’씨는 그해 한국방송작가협회가 선정한 작가상에 TV 라디오 합쳐서 최고상을 수상했고, 이 프로그램은 그해 ABU 아시아 태평양 방송연맹 방송콘테스트에서 라디오부문 특별상을 수상했습니다.
MBC라디오 <유정이의 작은 도전, 립싱크는 싫어요> 오디오 클립 (1분 30초)
모든 예술의 표현 방법 원리는 같습니다. 라디오 표현 방법 하나를 잘 익히면 수필이나 회화 같은 다른 종류의 예술에서 표현할 때 도움을 받게 됩니다. 거꾸로, 다른 종류의 예술에서의 표현 방법을 라디오에서 활용할 수 있습니다. 그림에 담겨있는 라디오 오디오 제작 방법에는 또 무엇이 있을까요?